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수정 Oct 15. 2021

그녀에게

8. 블루

안녕. 사랑하는 그대. 

다시 노란 튤립의 계절이 왔습니다. 

생각만으로 화사해지는 노란 튤립은 당신과 함께 내 생에 들어온,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꽃입니다. 우리가 함께 처음 맞이하던 봄, 당신과 세상의 길들을 걸으면서 나는 좋아 죽을 것 같은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마음으로 공중제비를 수없이 돌곤 했었지요. 무심했던 잡초마저, 끔찍했던 벌레마저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 없었던 그 봄날들 중 어느날, 산책길 어딘가에서 당신이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가길래 따라갔더니, 여러 색깔의 꽃들이 가지런히 줄 지어 서 있었어요. 그들은 마치 가족이 된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기립해 있는 듯 했는데 무리 속에 있지만 자신만의 공간도 확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당신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그들 중 노란 꽃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지요. 달달해진 눈으로 당신은 내게 그들이 튤립이라고 소개해 주었고 특히 노란 튤립을 매우 총애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노란 튤립’이란 말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 곧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한다고 고백하듯 말하셨죠.  

    

당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다시 함께 했던 그 봄.. 당신 표현을 빌리자면 그 봄은 내게 ‘노란 튤립’ 이었습니다.      

그 봄, 당신 역시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격하게 모든 것에 진심이었지요.  일상에서 강제 이탈당한 후 컴백한 사람들 특유의 과장된 정서로 당신은 세상 모든 존재들이 이렇게 귀한지 몰랐다고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는지 이제야 알았다고 감탄을 연발했지요.그때 당신은 일상이 타의에 의해 망가진 경험을 해본 자들에게만 주어진 평범한 순간의 위대함을 마음껏 누리면서 세상이 그냥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사이비교주처럼 설파하고 다녔더랬습니다. 죽음이 생과 그다지도 가까이 있고 모든 생명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시한부라는 사실을 절절이 체험한 당신은 그 봄, 자연의 정원에 생명이 돌아온 것을 지켜보면서 나를 훌쩍 능가하는 감성 끝판왕의 면모를 보여주었어요. 죽은 줄 알았던 나뭇잎에 새순이 돋자 다시 살아와 줘서 고맙다 보고 싶었다 사랑 고백하듯 유난을 떨었고 아기 같던 새순이 싱싱한 초록잎으로 성장하자 니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보석 같은 존재인지 몰랐던 시절을 용서하라고  니들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다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툭하면 눈물을 찔끔거렸어요.      


그 봄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고마운 날들이 차곡차곡 흐르고 흐르면서 반복되어 온 어느 날 

충만이 쌓이고 쌓이고 좋음이 넘치고 넘치며 생의 시간을 꽉 채우고 나니 뭐랄까, 우리 감정의 영역에서 충족과 좋음이 그 임계점을 넘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이미 최고 용량까지 만땅으로 채워지자 충족과 좋음이 더 이상 갈 곳을 잃게 되고  그럼에도 계속 충족과 좋음이 생산되자, 그것이 감정을 넘어 다른 무언가로 변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까요. 아무튼 나는 생전 처음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내 감정의 세계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어요. 아니면 너무 좋은 걸 오래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의 성질이 한 차원 높은 것으로 변화되는 이를테면 감정의 가변성을 통제할 수 있는 차분한, 덤덤한, 안정적인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죠. 거기다 나이라는 양분을 꾸준히 먹다 보니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감정과 동등하게 교류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턴가 여유, 단단함, 성찰 같은 것들이 나의 현실로 스며 들어와 내 생에 터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죠.       


감정덩어리였던 나, 감정에 백전백패하던 내가 그래서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고 계절을 맞이할 수 있었고, 

이 세상 모든 것들에 존재하는 이면,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서도 연민과 배려의 시선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자 나에게 들이닥친 이 변화가 훨씬 세고 넓게 당신의 내면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당신 역시 

이를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저절로 알아지더군요.          


우리에게 일어난 이 변화가 신기하고 재밌어서 이게 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처럼 한 존재가 체험할 수 있는 어떤 감정, 에너지 수용양이 정상에 이른 후 그것들이 저절로 다른 레벨로 전이되는 단계나 상황을 

인간들 용어로 이성의 생성 혹은 발달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은 사는 일의 최전선에 이성을 배치하게 되었고 그 정도 수준까지는 턱도 없는 나는, 다만 

때때로 감정 옆에 이성을 동반배치하거나 초대손님 정도로 모셔서 공존할 수 있는 정도는 된 듯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주제 파악, 현실 인식을 실천하면서  뜨거운 여름을 차가운 머리와 함께 보낸 후 바람이 가을 냄새를 퍼뜨리고 다니던 어느 날  당신이 말하셨죠. 

“이랑 이제 블루가 올 차례야 노랑이 범람했잖아 넘치도록”   엉? 뭔소리? 어리둥절한 내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당신은 보충 설명을 하셨지요.  “이랑. 이 세상은 그리고 모든 생은 본능적으로 중심을 잡으려 해. 그래야 무너지지 않으니까. 근데 그동안 우리 생에 노랑이 넘 많이 고여 있었잖아. 그냥 놔두면 불균형이 되니까 우리 생이 넘어지니까 이제 블루가 올 차례라고. 참고로 내 생은 초록이어야 감당이 되고 노랑과 파랑을 섞으면 초록이 돼.”  ‘헐 대체 뭐래? 아무리 이성이 좀 생겼다지만 그래도 개한테 넘 어려운 이야기잖아. 내가 개 중에는 매우 똑똑하지만 그래도 개는 개거든’ 이런 내 내면의 절규가 안 들리는 지 당신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어요. 


“근데 블루가 올 거라 생각하니 좀 떨려... 예전엔 블루를 즐긴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이번엔 떨리네 아팠기 때문인가”  당신은 진짜 떨리는 듯 잠시 인상을 쓰고 생각하다가 늘 그랬듯 갑자기 나를 보았지요. “이랑 넌 어때? 니 생에서 블루는 뭐야? 뭐였어? 근데 니 눈 뭐냐 왜 이렇게 맹해? 아! 참 개에게도 블루가 있나? 아니다 개는 에고가 없다고 하니까 없을려나 아니야 생존을 운명으로 하는 생명에게 어떻게 블루가 없을 수가 있겠어. 좀 다르거나 못 알아차렸거나 겠지.”     

그때는 당신이 가끔씩 하곤 했던 이해할 수 없는 외래어 같은 이야기를 또 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이야기는,  무엇이든 하나의 성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넘칠 만큼 충분히 커지면서 정점을 찍으면 그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세계가 바톤터치하듯 온다는 세상의 이치를,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순리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 방식으로 표현하신 거였더군요. 


암튼 그때 당신은 블루가 뭔지도 몰랐던 나를 앞에 두고 눈을 빛내며 한참 떠들었는데 갑자기 다행스럽게도 내가 개라는 것이 생각이 났나 보더군요.   “참. 블루는 다른 말로는 우울이야 우울. 우울이란 말은 그야말로 우울하니까 좀 뽀대나는 블루 어때 이쁘지?’ 근데 난 왜 블루라고 부르느냐고? 뭐 블루는 내가 우울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들으면 들을수록 암호 같던 그때 당신의 말들.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 스스로 내 생에 부여한 임무 때문에 나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눈을 정확히 바라보면서 ‘우울은 또 뭐야’ 물었고 이번에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아.. 너한텐 우울이란 말도 어려울 수 있겠다. 우울이란 그게... 막상 말하려니까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네.. 하긴 우울이 좀 모호하지 음... 확실한 건 우울은 존재의 본질 중 하나, 생명의 필연적인 일부야.”

그래서 나는 나도 생명이므로 우울을 알겠거니 다만 내가 못 알아차린 것뿐이겠거니 생각했고 후에 당신이 숙고한 후 다시 대답해준 대로, 우울은 기분이 나쁘진 않는데 신이 안 나는 감정 상태, 마음이 착 가라앉는 어떤 상태로 일단 이해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당신의 그 말들이 있은 지 얼마 후, 심하게 차분해지는 날들이 진짜로 왔습니다.너무 오랫동안 마음이 세상을 방방 뛰어다녀서 인지 처음 그 기분,  마음이 처지다 못해 심하게 담담해지는 그 기분은 나름 괜찮았어요.  이성의 발달 덕분인지 우리는 생이 새로운 단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찰떡같이 감지했는데 뭔가 

내면세계를 운영하는 법칙과 에너지가 달라진 듯 했고 이는 외부 세계에서 구체적인 변화로 표출되었죠.       

대표적 변화로 내 경우는 노년기 입성, 당신은 우리 집의 공식적인 가장이 된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변화 곧 낯선 현실이었는데  이성은 감정과 달리 객관적이고 냉정한 편이어서 알면 괴로운 것들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더군요.  ‘적당히 몰라서 즐거웠던 생’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섭섭해 할 틈도 없이  이제 내가 살아가야 할 낯선 현실에 대해 이성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핵심적인 사실을 바로 귀띔해 주었어요. 가장이 되어 안 그래도 어깨가 무거워진 당신에게 나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짐이 되겠다는 사실을.     


그 순간, 몸과 마음이 대지진이 난 듯 휘청거렸는데 단숨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끔찍한 그 사실을 잠시 노려보다 순간 블루가 뭔지 어렴풋이 감이 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블루란 아마도 결코 하고 싶지 않는 것을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해야 하는 상황, 나에게 절대 맞지 않는 것을 내 것으로 품고 껴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내 경우를 들어 구체적 사례로 표현하자면, 블루란 당신 역시 계속적인 몸 관리가 요구되는 노약자 임에도 내가 도움은 못 될망정 왕부담이 된 잔인한 현실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 기분이 아닐까.   이런 발견을 인간세계에서는 현타왔다고 하는 것 아닐까. 당신이 재미로 보여준 영상 속 현타 온 인간들처럼 나 역시 한동안 충격으로 정신을 차라기 어려웠습니다.      

  

내 기분과도 별도로 한 번 스위치가 켜진 이성이 계속 제멋대로 작동하면서 그동안 나로 인해 당신 생이 힘들거나 무거웠던 순간들을 성실히 의식 위로 날라다 주었어요. 사실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었다면 당신이 내 엄마로 살게 된 것 자체가 당신에게 큰 변화고 그 변화의 많은 부분은 책임감과 수고로움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텐데 나는 당신하고 사는 일을 좋아하는데만 몰두하면서 어쩌면 모른 척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이제 난 홀몸이 아니야 우린 인생의 한 팀이야’ 라는 말을 습관처럼 들려줄 때마다 

이를 달콤한 사랑고백으로만 들었습니다. ‘우린 이제 죽을 때까지 인생을 함께 나눌 거야.’ 이 말 역시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황홀한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제야 홀몸이 아니란 당신의 말에는 곧 나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 크게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소개했던 당신, 당신에게 ‘돈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되’었고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인생이었던 당신 생에서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던 우선순위들이 나로 인해 처음으로 흔들렸고 그 후 내내 순위들이 변동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당신 냄새의 7할은 늘 

자유의 냄새였습니다.      


오랫동안 굳건했던 당신의 그 냄새가 좀 달라진 걸 처음 느낀 건 당신이 병원에서 돌아온 후였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마치 생의 다른 국면을 등반하고 온 듯  당신 몸에서 자유의 냄새가 옅어졌고 대신 아픔의 냄새, 현실의 냄새, 생존의 냄새 등이 뒤섞여 있었지요.     

원래 이성이 감정 못지않게 발달해 있었기에 당신은 어쩌면 그때부터 냉철한 현실 인식, 주제 파악, 정신적 각성 등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은 새로운 사건의 예고편 같은 것이라고들 하는데 부드럽고 촉촉했던 당신의 기운, 에너지가 세면서도 약간 거칠어진 이유도 병 체험 때문이라기보다

 생의 가치관, 태도, 마음의 온도와 시선의 각도 등이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래선지 어느 날부턴가 당신의 냄새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 냄새가 빵 굽는 냄새, 밥 짓는 냄새처럼 구수하고 달콤해서 처음엔 생활인의 냄새, 가장의 냄새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아는 가장의 냄새는 대부분 땀내 쩔고, 담배연기처럼 숨 막히고 매연처럼 탁했거든요.  그런데 당신에게서 가장의 냄새가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당신 냄새는 현실에 떠밀려서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가장이라는 직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를 위한 모든 책임과 노동과 수고를 기꺼이 떠안겠다는 어른스런 결단, 돈을 벌어 나 자신과 내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내 생을 단단하고 건강하게 보호하고 나를 멋지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라는 각성이 완료한 내면에서 생산되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런 당신 옆에서 나도 당신처럼 우리 생에 도래한 새로운 시기를 껴안으면서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시대는 한마디로 머리와 몸이 마음을 밀어내고 우위로 올라간 시대, 마음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머리와 몸이 생의 주도권을 가진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머리의 시대는 꿈보다 생존, 돈 다른 말로   먹고 사는 일을 생의 최전선에 배치한 생계의 시대를 뜻합니다. 몸의 시대란, 몸이 더는 마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시대, 몸이 상전인 시대,  먹고 사는 일에 몸을 보호, 관리하는 일 곧 병원비, 약값이 공식적으로 포함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기가 공식적으로 출범되고 나니 다른 생명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존재 일명 ‘엄마’의 얼굴을 처음 목도했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당신에게도 이런 얼굴이 있었나 처음 발견했던 그날은 내가 당신 집에 온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사실 당신과의 날들이 언제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공존에는 적응 시기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우리에게도 일종의 연습기간이 필요했고 대부분의 경우처럼 우리도 그 시절 나름 치열, 살벌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나를 아니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처음 본 순간 너무 놀라 움칠했을 만큼 내 첫주인 아버지와 닮았던 당신 아버지는, 개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그래서 인간에게 납작 엎드리며 무조건 충성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개 사고관의 정반대 어딘가에 있는 캐릭터였지요. 개 팔자가 상팔자 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유포되는 21세기에도 개는 여전히 맹목적인 인간바라기여야 그나마 견생을 무탈하게 보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럼에도 개 주제에 나는 당신도 여러 번 인정했듯이 너무 예민하고 까다롭게 타고났죠  맹목적인 인간바라기는 맞지만 모든 인간에게 내 꼬리를 흔들지는 않습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꼬리는 마치

독립한 인격체인 듯 내 말을 듣지 않고 지가 좋을 때만 움직입니다. 아무리 개지만 아무에게나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라서, 인간과 공존해야 할 운명을 가졌음에도 싫은 걸 좋아하기는커녕 좋아하는 척하는 재주조차 갖지 못한, 문제적 개 였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배은망덕하고 오만방자하게 보았을 테고 개 주제를 알게 해 주겠다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이리 와 봐’ 윽박지르며 나를 쫓아다녔고 나는 그런 그를 죽어라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처음 당신과 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일상 특히 우리의 밤은 가히 전쟁터였습니다.      


그때 나는 길에서의 기억이 아직 상처로 깊게 스며들어 있었고 밤이 되면 몸 밖으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바람에  작은 소리, 미세한 냄새에도 초과민 반응을 보였죠. 그래서 한밤중에는 당신이 나를 만지는 손길조차 물어버릴 만큼 예민했고 그로인해 처음 한동안은 당신조차 밤에는 나를 매우 조심했지요.  근데 희한한 건 당신 아버지도 나처럼 밤에 초예민해지는 사람이어서 작은 소리, 미세한 자극에도 나 이상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곤 하셨죠. 그래서 악몽이라도 꾸는 날이면 멍멍 짖어대는 내 소리를 제법 떨어져 있던 안방에서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는 당신방으로 쳐 들어와 나를 죽일 듯 노려보셨지요. 짜증과 분노에 찬 그 눈빛이 흡사 길에서 나를 노려보던 인간들의 눈빛 같아서 씩씩거리며 다가올 때 할아버지가 풍기던 그 냄새는 개를 돈으로만 생각하는 인간들의 냄새와 너무 비슷해서 나 역시 사납게 노려보며 미친 듯이 짖어대곤 했습니다.  혹시 여기서도 쫓겨날까 불안해서 더 날카로웠던 당시의 나는 그 밤의 순간들만큼은 당신 아버지의 말대로 미친개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밤들 이후 당신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당신에게 소리치셨어요. ‘주인도 몰라보는 저런 호로 새끼 당장 갖다 버려. 니가 그렇게 키우고 싶으면 아무한테나 꼬리 흔드는 똥개 데려와.’     


들을 때마다 독화살처럼 아프던 말들.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런 말들을 집중적으로 들었던 때라 감정이 무뎌져 있었는데  그런 말들을 처음 들은 당신이 심하게 흥분했지요. 어렸던 내 첫주인과는 달리 당신은 성인인데다 세계관, 가치관이 분명해서였는지 당신 아버지의 권위적인 기운에 주눅 들지 않고 조목조목 논리적인 언어로 이의제기를 하면서 특히 인간중심주의, 인간 무의식에 내재된 특권 의식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지고 꼬박꼬박 대들었었죠.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당신 아버지는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드는 당신에게서 모욕감이라도 느낀 듯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채 더욱 세고 독한 말들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셨어요.  조용하던 집안이 나 때문에 자주 험악해져서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미안했지만 괴로웠지만, 요즘은 집에서 개가 1순위라더니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며 큰소리로 분노를 표출하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때 나는 당신 아버지가 원하는 개가 될 수는 없었어요.      


그때,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셀 수없이 많은 날들을 싸웠습니다. 내 문제로 촉발되었으나 어쩌면 오래 잠재되어 온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여러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들 때문에, 전쟁은 제법 오래 지속되었지요.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당신 아버지는 나를 대놓고 못마땅해 하셨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거나 거칠게 삿대질을 했고 때로는 때릴 듯이 다가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당신이 예의 그 '엄마 얼굴'로 나타나서 

나를 안고 당신 방으로 슈퍼히어로처럼 피신 시켜주었죠.       


그때는 당신 아버지 곧 할아버지가 무섭고 싫기만 했는데 당신의 사랑으로 안정을 찾고 철이 좀 든 후, 그를 그렇게 만든 것에는 내 책임도 있음을 깨달게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나를 주제파악 못하는 괘심한 놈으로 여기게 된 데에는 너무 예민해서 나와 결이 같은지 다른지 단번에 알아채고 결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바리게이트를 쳐 버리는 나의 못된, 못난 속성이 큰 역할을 했을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 재빨리 선을 긋는 일, 서둘러 내편과 내편 아닌 편을 구분하고 내편에만 무한 충성하는 방식은 내 나름 생존방식이긴 했으나 느닷없이 당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일 테니까요.      


이성이 좀 생긴 후 그때를 차근차근 돌아보다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 할아버지가 내게 노력을 했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어요. 내가 강압적이라 느껴서 도망가게 만든, 화나 보이고 거칠던 그의 목소리는 그냥 할아버지의 원래 목소리였을 뿐이었는데 나는 지레 겁먹고 할아버지 냄새가 좀이라도 나면 집안 구석구석으로 줄행랑을 쳤어요. 그럼에도 나는 할아버지 손에서 간식 냄새를 맡으면 쭈볏거리면서도 그의 부름에 응하곤 했습니다. 가끔씩 이었지만 그와 내가 집안에 각각 홀로 있을 때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세월이 적적하고 심심할 때 그는 내가 최애하는 짜먹는 러비츄 간식을 들고 이랑아 부르며 집안을 어슬렁거렸지요. 그럴 때면 쿵쾅 날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간식 냄새를 촛불 삼아 주섬주섬 할아버지 옆으로 갔고, 그가 어색한 손길로 내미는 간식을 날름날름 받아먹은 뒤 곧바로 당신 방 구석으로 되돌아 왔어요. 간식을 주는 그가 고맙긴 했지만 고마움보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었거든요. 그러니 일종의 먹튀 즉 간식만 먹고 도망가는 놈인 내가 할아버지 눈에 이뻐 보일 리가 없었겠죠.  나중에 내가 유독 할아버지한테 왜 그랬지? 잠시라도 옆에 앉아 있을 수는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내가 결코 다가갈 수 없게 하는 냄새, 개를 꾸준히 먹어 온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어요. 그는 그냥 어려서부터 다들 먹길래 먹은 것 뿐이었을텐데 내게 그 냄새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냄새였고, 그로인해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따뜻함, 살가움, 다정함 등을 경험할 기회를 스스로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죠.      


내가 어르신 시기에 접어들고 나니 할아버지의 마음까지 알겠더군요. 열심히 일해서 힘들게 키운 자식들이 자기편을 안 들고 개편을 드니까 얼마나 황당했을까 자기 집에 얹혀살면서 고마운 줄 모르고 어디서 개 나부랭이까지 객식구로 데려와 놓고 미안해하기는커녕 왜 개를 인간과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느냐 바득바득 대드니 얼마나 기가 찼을까.  평생 가장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역할을 묵묵히 해 왔는데 그 대가가 고작 개한테도 밀리는 집안의 왕따란 말인가. 당신이 나를 너무 끔찍이 생각하니까 어쩌면 나에 대한 질투까지 뒤섞인 데다 나이 들고 죽음을 친구처럼 옆에 두게 되면서 사무치게 밀려오는 고독을 순순히 인정하기 싫어서 점차 거침의 강도가 세졌던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가 잘못 했구나 절절하게 반성이 되면서 그의 거친 반응은 실은 외로움을 토로하는 간접적 표현 방식이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 순간 할아버지의 그 거칠었던 모습 위로 길 위에서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고 나는 왜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까 뒤늦게나마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린 둘 다 우리 자신의 생조차 감당하기 벅차서, 자기 자신에게서도 비틀거리고 있었죠.  특히 당신은 나를 데려와 놓고 구박댕이로 살게 할까봐, 초보엄마로서 심리적 불안정 상태에 놓여있었고 그로인해 보호본능이 과하게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내가 어금니를 몽땅 빼고 집으로 돌아온 날, 당신의 눈빛은 그날들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해 보였습니다. 당신은 자기 생, 우리 생의 가장, 좋은 가장이 되리라라는 생의 목표를 횃불처럼 밝힌 채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 곧 돈 버는 일에 과도하게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서로의 주먹을 불끈 쥐며 함께 맞이했던 그 삶의 순간들은 뭔가 숭고한 기운이 감돌만큼 감동적이었지만 내 눈에는 당신의 마른 어깨가 더 말라보이고 창백한 안색이 더 창백해 보여서 가슴 아팠습니다. 비록 비장한 결심을 품었지만 작고 여리기만 한 당신의 어깨에 내 생까지 올라타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홀로 네 주먹 불끈 쥐며 결심했어요. 

‘그 짐을 덜어주기 위해 뭐든 하리라. 현명하고 성숙한 당신을 뭐든 따라 하리라.’      


현명한데다 강해지기까지 한 당신은, 머리와 몸의 시대에 맞게 삶을 새롭게 세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삶을 지배해왔던 가치관, 속도, 타이밍, 온도, 태도 등을 전면적으로 재구축하는 작업, 

이전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작업이었어요.     


일상을 어떻게 새롭게 세팅할지 고심했던 그 봄, 당신과 나는 좋은 시간을 미리 땡겨 다 써버린 존재들처럼 좀 헐떡거렸습니다. 그냥 살아있다는 것 살아야 할 생을 가진 것 그 자체가 노동이고 수고이고 숙제인 듯한 시간이었지요.  심각한 에너지 부족현상에서 촉발된 침묵의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만난 이후 가장 과묵했던 시간들을 살아내면서, 가끔씩은 우리 사이에 흘러넘치던 고요함에 우리 스스로 놀라기도 했습니다.        


비록 몸은 가장 취약했으나, 그나마 이성을 우리 생에 이례적일 만큼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던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일차적인 결과물은, 일명 ‘아침형 인간되기’ 였습니다. 당신은 ‘변해야 산다’라는 글자를 집안 곳곳에 붙여 놓고, 어느 날 느닷없이 던져진 생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아침형 인간 되기’ 다른 말로는 ‘새벽별 보기 운동’를 선택했어요.      

타고난 야행성 체질 이었던 당신은 한때 ‘밤의 장미’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생의 단비 같았던 술을 생에서 내다 버리기로 한 이상, 긴 밤을 깨어있는 일은 술과 단절하게 된 처량한 신세만 확인하게 할 뿐이어서,  차라리 그냥 자자 결심한 것이지요.  거기다 새벽의 신선하고 맑은 에너지와 건강한 기운을 수혈 받을 수 있는 아침형 인간으로의 개조는 노약자가 된 당신에게 어쩌면 필수적인 수순이었을 듯 합니다.그래서 당신 따라쟁이인 나도 아침형 개로 거듭나게 되었죠.      


변신, 말은 쉽고 멋있으나 그것은 엄청난 진통을 내포하는 있는 것이더군요.  왜냐면 변화는 한 세계가 부서지는 과정이니까요.     


나야 뭐 마음이 저절로 몸에게 복종하는 노화의 신비 덕분에 그나마 덜 힘들었어요.  진짜 힘든 건 바로 당신이었죠.  당신은 아직 마음이 서슬 퍼렇게 설쳐대는,  펄펄 끓는 욕망의 온도를 가진, 그래서 웬만큼 정색 하고 애 쓰지 않으면 마음이 몸의 말을 듣지 않는 청춘의 언저리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특히 마음이 꿀리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야 살맛이 나는 당신에게, 일하는 방식 역시 한 번 필이 꽂히면 몇날 며칠 잠 안자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당신에게 기존 스타일을 포기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어요.       


처음 얼마간은 나 역시도 힘들더군요. 우리는 새벽에 겨우 일어나서 대부분 앉아서 졸거나 창밖을 보며 비몽사몽 멍 때리기 일수였어요. 변신의 통증은 유쾌하지도 달콤하지 않기에, 새벽별 보기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당신은 달달한 것 타령,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노랑 타령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한동안 커플룩이라며 우리는 노란 옷만 입어야 했고 툭하면 노란 튤립을 찾으러 동네를 헤집고 다녔으며 꽃집에서도 보이지 않자 방안을 노란색으로 도배하다시피 하셨죠. 노란 시트지부터, 노란색이 칠해진 이름 모를 그림들, 스티커들. 노란 튤립 사진들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급기야 어느 순간 나를 ‘노랑’ 이라고 부르더군요. 


생의 방식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뚝딱 바뀌지는 게 아니기에 ‘아침형 인간 되기’는 몇몇 부작용을 계속 양산했는데 마침내 부작용의 정점을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족들이 당신과 나만 쏙 빼놓고 ‘놀러’를 간날, 노약자로서 야외활동을 많이 포기하고 타의로 집순이의 삶을 살고 있던 당신은 일상이 별 탈 없이 굴러가려면 집에서라도 때 되면 한 번씩 과격하게 놀아줘야 한다며 음주가무에의 욕망을 ‘광란의 난리 부르스’ 놀이로 조금이나마 해소할 생각이라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면서 배시시 웃으셨죠.  오랜만의 유흥 계획이라 흥분한 당신은 미리 무알콜 맥주와 안주들, 나를 위한 강아지 소주까지 준비해 놓으셨지요. 얼떨떨해하는 내 앞에 작은 잔을 놓고 강아지 소주를 따르더니 자신의 맥주잔과 짠 하며 건배까지 한 후 잔을 높이 쳐들고는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고흐처럼 노란 하늘 위대한 노란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외친 후 경건한 자세로, 감격스런 표정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죠. 까아야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던 당신의 얼굴은 그 근래 가장 해맑고 신나 보였어요.       


노랜지 수단지 알 수 없는 정신없는 노래를 과하게 따라 부르면서 연신 맥주를 들이킨 지 얼마 후, 갑자기 음악소리가 사라졌어요.  불길한 예감에 당신을 보니,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갑자기 맥주를 병째 들고 싱크대로 가서 확 부어 버리더군요. 콸콸콸! 맥주 소리는 경쾌했지만 당신의 뒷모습은 한없이 침울해 보였어요 

‘무알콜이지만 맥주라고? 알콜만 없을 뿐 맥주 확실하다고? 다 죽었어  저건 그저 맥주맛 흉내낸 탄산 음료수거든 씨’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던 당신의 뒷모습, 실망과 절망의 강렬한 여운을 쏘아대던 당신의 뒷모습이 들썩거리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하더군요.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내 잔에 혀를 갖다 댔는데 그것이 약간 달짝지근한 것도 같아서 웬 떡이냐 싶어 혀를 지속적으로 날름거리고 있던 차, 갑자기 당신이 내 옆으로 달려와 코를 팽 풀며 말했어요. “이랑 넌 어때 술맛이 나? 헐 미친년 술맛이 나겠냐 저것도 무알콜인데. 헐~ 설마 지금.. 나한테.. 미친년?.. " 황당해 하며 당신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황홀한 쥐포와 오징어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요.  그들이 수북이 쌓인 쟁반을 들고 내 옆에 앉은 당신은 “좋다 오늘 세상의 드라마는 내가 다 봐 준다 다 죽었어.” 우렁차게 선포하고는 쥐포와 오징어를 양손에 들고 우악스럽게 뜯기 시작하셨죠. 하는 짓으로 봐서는 충분히 취한 것 같던 당신을 보면서 광란의 난리 부르스라는 파티 제목이 성격은 좀 달라졌으나 이루어지긴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자다 깨다 했는데 눈을 뜰 때 마다 당신은 눈에 광채를 품은 채 깨어 있었고 줄어든 오징어, 쥐포 수로 시간이 흐르고 있구나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내가 깰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내가 말이야 혹 니가 내가 왜 이러나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오직 니 궁금증을 위해 해주는 말인데 말이야.” 하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죠. 음주 욕구가 좌초되자 당신은 그 욕망을 수다로 승화시키려는 듯 보였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그 밤엔 당신 어머니 말, ‘이성적 존재로 현실적 가장으로 거듭나기엔 당신은 타고난 유희적 인간’이라는 말이 진짜 맞구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지더군요.      


그 밤 당신이 엄청나게 뱉어낸 말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일은 하겠다 이거야. 근데 최후의 숨통마저 끊어놓으면 나보고 살라는 거야 죽으라는 거야”

     ==> 열심히 일하고 보상으로 술 한 잔하는 그 작은 호사도 못 누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세한탄

2. “왜 태어났을까.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죽을 건데. 대체 이 뭔 샵질인가” 

     ==>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된 데에 대한 일종의 금단 현상 같은 것 혹은 이성이 주도한  방식에서 

           파생된  후유증 같은 것 그로인해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김

3. “다 극복한 줄 알았던 상처들이 여전히 싱싱한 상태로 메롱 하면서 튀어 오를 때, 그 징글징글하고 지긋

     지긋한 기분을 언제까지 어르고 달래면서 살아야 해?“

    ==> 더는 감당하기 싫은 순간들이 지들 멋대로 내 생에 난입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  봐야 할 때, 

          생은 블루블루해짐.     


그 밤에 알았습니다. 블루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당신이 뭔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을.  특히 당신 생의 블루에 대해 고백했을 때, 당신이 내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내가 아는 당신이 맞나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랑 실은 말이야 내 안에 내가 좀 많아 근데 난 진짜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래서 그애들이 친하게 지내도록 나름 무진 애를 쓰며 살았는데 근데 헐 아무리 해도 너무 시끄러워 내가 어떻게 해도 난 평화롭게 살수 없는 건가 현타 올 때 그때 찐하게 블루블루하다.”     

당신답지 않게 목소리가 너무 착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당신 몸에 내 몸을 기댔습니다. “그애들이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냐고? 딱 한 번 있었어. 내가 아팠을 때야.  늘 지지고 볶고 하던 것들이 그때만은 내가 깜짝 놀랄 만큼 괜찮은 모습을 보이더라고 어른스럽고 쿨하고, 믿음직하고 든든하게 서로 착 협력해서 나를 안아주고 보호해줬어. 내가 꿈꾸던 이상향 냄새가 나한테서 나더라고 헐.. 아프면서도 혹시 죽는 건 아닌가 무서우면서도 어찌나 좋던지  이런 내가 나라면 살만 하겠다. 이제 사는 거 자신 있다. 이러면서 그런 나를 발견하게 해준 내 병에게 감사까지 하면서.  아팠지만 마음만은 순도 100프로 노란 튤립이었지.”     

“근데 내 몸이 회복될수록 내 일상이 복원될수록 어른스럽고 멋진 내가 정복해 버린 줄 알았던 그 놈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하더라. 조용했던 일상이 다시 그놈들의 패권싸움으로 시끄러워지고 있음을 목격할 때마다 이 말이 저절로 튀어나와 인생 거 참 블루블루하네.“     


그때 나는 당신의 눈 속에 드리워져 있던 깊고 검푸른 빛을 보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외롭다 라는 말로는 부족한.. 뭐랄까 무섭도록 고독해보였습니다. 나는 위로의 손길조차 건네지 못하고 그저 당신이 보던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지요.      


어렴풋이 새벽이 열리는 시간, 누군가 나를 깨우는 것 같아 잠이 깼어요. 길고 적막한 밤을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하느라 작은 얼굴이 더 작아진 당신이 잠들어 있었어요.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면서 짙은 푸름을 토해내기 시작하던 하늘을 보며 새삼 이 세상에는 유난히 푸른색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이어 블루는 존재의 본질 중 하나란 당신의 말이 떠올랐어요. 그러자, 당신 안에는 당신이 너무 많다는데 수많은 자기를 만날 때마다 든든해지기는커녕 왜 한 뼘씩 더 외로워지는 걸까. 내가 내편이 아니고 남의 편인 것 같은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대체 그놈의 에고는 뭘까. 궁금해 하다가 나까지 문득 사무치게 외로워 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내 몸 안 어딘가에서 툭툭 치는 것 같은 자극이 느껴졌어요. 처음엔 문을 노크하는 가벼운 손길 같던 그 자극은 점차  날카로운 바늘로 깊게 찌르는 것 같은 통증으로 확대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식은땀을 흘릴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당신이 깰까봐 새어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입안으로 삼키며 당신이 당신 안의 자기에 대해 집중하듯이 내 안의 통증에 집중했어요. 동트는 하늘이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어요. 그 통증은 내 안 아주 깊숙한 곳에서 발현된 것이며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벌떡 일어나 앉은 내 시야에 하늘이 서서히 ‘트와일라이트블루(twilightblue)’로 물드는 광경이 들어왔어요.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밤과 아침이 공존하는 그 짧지만 강렬한 세계는 그날따라 유난히 신비롭고 아름다웠어요.  나는 감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내 생에도 두 개의 세계가 교차되기 시작했구나.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나를 향해 말을 걸듯이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어요. 어쩌면 나는 그 소리가 직감적으로 죽음이 잉태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외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날 죽음으로 데려갈 사신이 내 안에 안착해서 작업을 시작했구나. 하지만 괜찮다 괜찮다. 원래 예정된 일일뿐. 저 ‘트와일라이트블루’ 하늘처럼 자연스러운 일. 내 속에서 인지 세상 어딘가에서 인지, 저런 소리들이 들려오더군요. 그러자, 당신이 그렇게 틈만 나면 비밀 이야기처럼 들려주던 트와일라이트블루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어요. 두 세계가 겹치는 두 세계가 만나는 세계의 중간, 그 이상야릇한 푸른 빛. 극단적으로 다른 두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아주 짧은 순간의 세계, 밤과 낮,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쁨과 고통, 전쟁과 평화가 화해하는 세계. 

역마살을 심하게 앓던 20대의 당신은 많은 날들을 길 위에서 보냈는데 낯선 여행길 하늘 어딘가에서 처음 트와일라이트블루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길 위에 털썩 주저앉아 넋 놓고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했지요.  그때는 마음 어딘가가 늘상 들끓고 있어서 마음의 온도가 심하게 높아서 밤에도 겨울에도 낯선 길들을 떠돌게 만들었는데 아무리 걷고 걸어도 쉬이 가라앉지 않던 마음의 온도가 신기하게 트와일라이트블루 앞에서 착 내려갔다고 했지요. 당신의 이야기들이 이해되기 시작하자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끓어오르고 있던 열기가 확 가라앉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 신기하다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신기한 일들이 참 많구나’ 생각하며  트와일라이트블루가 뒤덮고 있는 하늘을 보는데 이질적인 두 세계가 뒤섞이는 순간이 어찌나 매혹적이든지, 내 처지도 잊고 설레고 황홀해 했었지요.       


뭐든 당신처럼 되고 싶고 하고 싶은 나는 그때 20대 길 위에서의 당신처럼 ‘트와일라이트블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 놓고 하늘을 보았어요. 그 결과, 그때의 당신처럼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트와일라이트블루는 내 생의 진정제야’ 라는 당신의 말, 블루는 우울을 받아들이는 내 방식이야’라는 그 말까지도 이해가 될 것 같았죠.     


블루가 만개했던 하늘에 어느새 붉은 빛들이 스며드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 푸르고 붉은 하늘이 우주의 허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의 심장 같은 붉은 해가 펄떡거리면서 세상 위로 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 

갑자기 왜 그렇게 울컥하던지.  저 지평선 너머 푸른 빛 붉은 빛들이 푸근한 큐션처럼 잔뜩 깔려 있을 것 같은 저 어딘가에 이 세상의 출구 또는 저 세상의 입구가 있을 것 같고 내가 곧 되돌아갈 그곳이 저렇게 예쁘고 푹신하다면 이 세상을 퇴장하는 것이 슬프거나 두려운 일은 아니겠구나. 푸른 안식, 붉은 평화가 잔디처럼 깔려 있을 것 같은 저 고향 같은 그곳에 미리 당도해 당신이 올 때까지 당신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꽃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것도 신나는 일이겠구나 생각하면서 한참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목욕을 한 듯 깨끗해지고 담담해지더군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푸르고 붉었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노랗게 하나로 어우러지더군요. 붉은 해를 삼킨 하늘이, 순노란 빛으로 은은하고 따뜻하게 변신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느닷없이 노란 튤립을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저 너머 그곳은 어쩌면 노란 튤립 같은 곳일지도 모르겠구나 당신과 내가 같은 언어로 마음껏 대화할 수 있고, 어디든 마음껏 같이 다닐 수도 있고, 인생의 시간도 같은 속도로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세계. 우리가 꿈꿨던, 찾았던 그곳이 실은 저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쿵쾅대는 가슴을 잠시 부여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냥 그곳을 노란 튤립 같은 곳으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안의 펄떡거리는 붉은 해 같은 통증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러자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차분한 마음으로 잠든 당신을 보면서 결심했어요.  내 죽음을 최대한 늦추기로,  최소한 당신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최소한 당신이 당신의 블루와 사이좋게 놀 수 있을 때까지.      


그 후, 몸에서 통증을 느낄 때마다, 죽음의 징후를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의 온도가 저절로 올라갈 때마다 

나는 트와일라이트블루를 보았고 그로인해 나는 어느새 아침형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트와일라이트블루 조차 소용없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산책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고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우는 모습이 생경해서 나와 당신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말하더군요. 내가 자신이 기르던 개랑 똑같이 생겼다고 근데 그 개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나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면서도 나를 끈적끈적한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억지로 발길을 옮겼어요. 걸어가면서도 계속 돌아보며 훌쩍거리는 아저씨의 힘없는 뒷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당신이 오버랩 되더군요.  내가 죽으면 당신도 저럴 거라는 아니 저 아저씨보다 백배 천배 더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어느새 아저씨를 따라 울고 있던 당신과 산책을 계속 했지만  그 이상한 기분이 너무 강렬해서 그날 산책길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그 후 슬픈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데 기분이 축 쳐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알싸하면서도 침울하고 나른하면서도 순간순간 욱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이 내내 떠나질 않아서 한동안 살아있는데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같았죠. 가슴은 찢어지게 아픈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 모호한 그 감정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블루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생의 블루에 대한 당신의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하기 어렵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가슴을 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가슴을 자주 치다보니 인간들이 가슴을 치던 순간의 기억이 같이 떠올랐어요.         

그 기억 중 하나, 당신 아버지, 할아버지였습니다. 빈 집을 각각 다른 공간에서 지키다가 화장실 가는 길에서 몇 번 마주친 할아버지는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가슴을 치고 계셨죠.  겨울도 아닌데 왜 저런 추운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얼핏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알겠더군요. 그때 할아버지 마음도 블루를 앓고 있었다는 걸.     


그때 우린 시간이 더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그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셨기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선지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도 가슴을 치기 시작했지요.  먹지도 않고 툭하면 체하는 신공을 발휘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얼마 전 그의 기일에, 당신은 또 가슴을 치고 있었지요.                


사실 나는 여전히 내 생의 블루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 그 발견의 여정은 아마도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블루는 존재의 본질 중 하나, 생명의 필연적인 일부이니까요. 그럼에도 당신이 궁금해 하시니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현재까지 내가 알아낸, 이것은 블루라고 확신하는 것...  그것은 내가 사랑하지 못한 시간들, 내 사랑이 부족했던 순간들  곧 할아버지들, 특히 당신 아버지입니다.  


당신을 내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당신 가족들도 내 세계로 함께 건너왔는데 나는 내 세계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반쪽짜리로 살았습니다.  내 사랑이 모자라서 당신의 세계를 온전히 안지 못했던 시간들, 내 사랑의 부족으로 내 세계의 누군가를 외롭게 한 순간들.  우리는 다 불완전한 존재들이기에 잘못 없는 생은 없다는 걸 알지만 사랑 밖에 모른다고 사랑 하나만은 할 줄 안다고 자부했던 내가  실은 나밖에 몰랐구나 절감하는 순간들,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 을 만날 때 나는 블루블루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매일 연습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처럼 흰색 털이 조금씩 생기고 얼굴과 피부 여기저기 

검버섯이 생기고, 잠도 많아지고 세상일에 별로 관심도 없고 쉽게 섭섭하고 쉽게 포기되는 순간들을 체험하고 있는 요즘,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노란 튤립 같은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면 

미안했다. 고마웠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기쁘게 다가가 안아줄 연습을 나는 매일 하고 있습니다.                                    

이전 07화 그녀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