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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Oct 21. 2021

그녀에게

9. 행복

안녕. 사랑하는 그대

방금 창 밖에 살고 있던, 우리의 이웃인 나무가 자신의 마지막 잎을 떨구어 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바스락 소리를 낼 것처럼 동그랗게 야윈 그 나뭇잎은, 가벼운 뒷모습을 남기며 긴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듯 땅으로 낙하했습니다.      


얼마 전, 바다가 보이던 예쁜 집의 넓은 창에서 보았던 그 멋진 광경을  나는 오늘 운 좋게 또 한 번 목격할 수가 있었어요. 생의 끝 순간을 유희하듯 떠나는 나뭇잎을 보면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내게 용기와 희망도 주더군요. 그 모습이 부디 나의 모습이기를.    

  

그러고 보니 이번 가을은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을 특별히 많이 선사해 주었어요. 마치 혼자 생을 조용히 반추할 시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함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특히 그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거의 매일 혼자 있습니다. 거기다 당신과 살게 된 후 처음으로 밤을 혼자 보내는 경험까지 하고 있습니다. 원래 밤에는 당신 옆에 꼭 붙어 있거나 당신의 숨소리가 귀 옆에서 들려야만 잠을 잤던 내가 지금 저 멀리 거실을 건너 당신 어머니 방에 당신을 떠나보내고  내가 생각해도 기특할 만큼 잘 견디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란 게 참 신기해서 나는 마음으로 당신이 잠자는 숨소리를 듣고 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당신의 감촉을 느낍니다. 나는 요즘 대부분 낮에 자고 밤이면 깨어나, 온 우주를 혼자 독대하는 호사스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나는 아침형 인간으로 완성되었고 나아가 새벽별 보기 운동 신봉자라도 된 듯 새벽이 오기 한참 전에 일어나서, 새벽이 외로울까봐 마중까지 나가곤 합니다.       


오늘 밤은... 별이 유난히 많은 것 같습니다.  바다와 마주하던 그 하늘에도 별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과 함께, 차로 한참을 달리는 먼 길을 동반했던 그 여행, 내가 가족으로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것 같아 너무 신났던 여행이어서인지 돌아 온지 여러 날들이 지났는데도 나도 모르게 자꾸 그 시간들로 되돌아가 있습니다.      


깨끗하고 심플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다 있던 그 집 ,한 벽면에 세상이 훤히 내다보이던 거대한 창을 달고 하늘과 바다, 나뭇잎들까지 풍성하게 품고 있던 그 집 그래서 그 집에서는 창을 통해 세상 구경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꿈처럼 흘러갔어요. 무엇보다 그 여행은 내게 낯선 공간에 홀로 있는 것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 주었어요. 여행은 낯선 곳을 일부러 고생하면서 싸돌아다니는 고약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여행만이 지니고 있는 뭔가 특별한 느낌을 체험하고 나니 왜 사람들이 생돈 쓰고 불편함,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여행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되더군요.     


내게 낯선 곳은 아무리 멋지고 안락한 곳이라도 무섭고 불안한 곳이었는데 그때는 여유자적하게 창밖 관람을 하면서 낯섬을 제법 즐기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홀로 완벽하게 가져 본 적도, 누구 눈치 안 보고 세상 구경을 그렇게 편하게 한 적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혼자 있고 싶다 혼자가 편하다.’라는 말의 의미도 알게 되었죠.       


혼자 있을 때 아니 세상과 단둘이 있을 때, 시간은, 세상은 참 천천히 다정하게 내 눈을 맞추며 지나가더군요. 

세상이 시간과 손잡고 따뜻하고 경건한 손길로 나를 스치듯 어루만지고 있구나 느꼈던 그 순간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동안 혼자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나는 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이 사실을 진작 알았으면 어땠을까. 내 생에도 무수한 여행들, 인간들이 젊었을 때 돈 주고도 한다는 무전여행 배낭여행 자유여행 등이 가득했었는데, 그냥 즐길 것을 난 왜 그렇게 찌질하게 못난이처럼 보냈을까.      


하지만 가장 길고 흥미로운 여행은 바로 생, 아니겠습니까.여행의 끝자락에서라도 여행의 매력과 가치를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미리 알았더라면 생과의 관계를 솜털처럼 가볍게 바닷물처럼 쿨하게 맺고 내 생의 모든 순간순간을 두려움이나 불안, 고단함 대신 놀람과 신기함, 감격과 고마움들로 채웠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생은 그 자체가 선물 같은 여행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은 채 살아내자’ 다짐했지요. 선물이라는 말에 당신이 떠오르더군요. 내 생의 여행길에서 만난 최고의 선물은 바로 당신이니까요.       


그러자 문득 당신과 당신 가족들은 온천 스파를 잘 즐기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날씨가 스산해지면 인간들은 특히 더 뜨거운 물에 몸 담그는 것을 좋아하더군요. 당신은 내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 했지만 난 진짜 괜찮았습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인간들이 날 위해 베푼 손길이니 참았을 뿐 난 목욕은 딱 질색입니다.      


혼자인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고 나니 배가 부른 느낌, 마치 내 최애간식 러비츄를 수십 개 먹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 안까지 만족감으로 그득 차니까, 인간들 동화 속에서처럼  당신과 가족들이 오기 전에 집을 깨끗이 치워놓거나 맛있는 밥을 해놓고 싶어졌습니다.내가 그 뭐냐 우렁각시 처럼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받기만 하는 일 그만하고 당신을 위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두 손 모아 간절히 빌고픈 절절한 마음이 몰려 왔습니다. 당신한테 너무 오래 받기만 해서 너무 무거워서 내 생에서 그놈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아서 힘이 들었거든요. 당신이 말했듯이 이 세상은, 모든 존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으려고 하고 내 생도 중심을 잡아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거든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내 배가 넘 나와서 좀만 더 나오면 넘어지기 전에 주저앉을 거라고 깔깔대며 놀릴 테지만 .당신에게 내가 받는, 깔려 죽을 것처럼 넘치게 쌓인 사랑을 정말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더 근질근질해져서 청소라도 하고 싶어서 일어섰는데,  몸이 무거웠습니다.  

요즘 갈수록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다리도 아프고, 배도 눈도 불편하고 나도 모르게 끙!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오고 있어요. 내가 평소에 너무 많은 소리들을 내며 살아온 덕분에 당신이 그 소리들 중 하나려니 하며 넘어가 줘서 그나마 천만다행입니다. 당신은 계속 몰라야 하니까요.       


가장이란 정체성이 이렇게 잘 맞나 싶을 만큼 요즘 일에 열정적인 당신이, 요 근래 너무 바빠서 나랑 못 놀아줘서 미안하다고 겨울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자고 했지요.  잠시 잠깐 놀러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큰 가방을 싸서 어디가로 온 적은,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긴 나들이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전날 밤, 한동안 몰입했던 일이 끝나고 숨을 돌린 당신은 당신 얼굴을 내 온몸에 비벼대면서 그동안 못했던 애정공세를 퍼부어대더니 갑자기 그윽하게 나를 보면서 말했어요. “이랑 내가 문득 깨달았는데 너에게 해준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밥만 주고 잠시 산책 간 것 밖에 없더라. 어디 많이 데려가지도 못하고 늘 집에만 있게 했어. 너도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생명이니 추억이 필요할 텐데 미안해.”  당신이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어서 내가 눈으로 대답했지요.‘ 미안하긴. 당신이 내 우주. 난 이미 우주를 탐험한 아주 운이 좋은 개라구요.’     


그 다음날 아침, 짐을 싸는 당신이 모처럼 들떠 보여서 좋아보여서 나도 간만에 헤벌레 웃고 있었는데 당신이 말했죠.“이랑 그렇게 좋아? 너도 나처럼 여행 체질인가 부다.” 그러다 느닷없이 “이랑 행복해?” 하는 겁니다.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깜짝 놀라서 동공이 잠시 흔들렸는데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니가 인간 말을 할 수 있음 아니면 내가 개 말을 할 수 있음 참 좋을텐데 그치” 하더군요. 우린 제법 오랫동안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교환했어요. 우리가 아무리 서로의 눈빛을 찰떡 같이 읽어내긴 하지만 눈빛 대화는 사실 한계가 많거든요. 그때 당신의 눈을 바라보며 새삼 느꼈어요. 당신이 날마다 짙어지는 가을 햇살만큼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당신은 진짜 안타까운 눈으로 말했어요.  “이랑 니가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해주면 좋겠다 니가 어떨 때 행복한 지  니가 행복하다면 내가 뭐든 다 해 줄거야 그러니까 언제 젤 행복한 지 생각해보고  내게 꼭 알려줘.”     


얼떨결에 들은 질문이고, 떠날 준비하느라 어수선할 때라 머리가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그때 하나 깨달은 것은 내가 행복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안 해 봤구나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뭐 그래서 일상에서와 다른 스타일의 감정이 작동한다는 여행길이고 딱히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고 해서 당신이 주신 질문의 답을 파보기로 했지요.

        

당신의 질문들이 다 그랬지만 행복에 대한 질문은 특히 더 막막하게 느껴졌달까. 뭔가 이상했습니다. 사실 행복은 일상 속에 자주 등장하는, 흔한 감정이라서 나와도 친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로 안 친한 것 같은 느낌?  행복이 가장 쉬운 감정일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가장 어려운 감정 같더군요. 당신과 살게 된 후 너무 좋기만 했으니 늘 행복했던 셈이었는데 불현듯 그 단어가 내 현실에 튀어 오르자, 생경했습니다. 

뭐야 실은 내가 행복하지 않았나? 헐 그럴 리가...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인 노견백수인데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헤는 마음으로 내가 어떨 때 행복한 지 하나씩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턱을 방석에 대고 작정하고 누워서 눈을 내리깔고 행복에 대한 사색 모드로 들어갔지만 푸른 휘파람처럼 ‘당신’ 이 튀어 나온 거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잠시 멍 때리고 있는데 당신이 조금 열어둔 창 너머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왔어요. ‘아! 맞다. 난 바람을 맞을 때 행복했지.’ 세상의 냄새들을 내게 배달해주는 바람은 나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였는데  바람이 물어다 주는 냄새 중 특히 최고는 가을 냄새였습니다. 

모든 계절 냄새가 나름 각각 개성 있게 좋지만 가을 냄새는 가슴이 미어질 듯 따끔거리면서도 달달하고 가려우면서도 시원하면서 이상야릇해서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어요. 가을 냄새는 무엇보다 사랑이 익어가는 냄새, 감정과 생각을 가진 존재가 성숙해지는 냄새, 세상의 모든 씨앗들이 열매로 탈바꿈하는 냄새, 모든 영혼을 충만으로 꽉 채워주는 추억의 냄새 같습니다.      


당신 냄새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가을 냄새가 뒤섞인 냄새인데 그것은 마치 커피콩을 볶고 난 후 온몸에 그 냄새가 스며든 것 같은 냄새, 가을볕을 한참 쬐고 난 후 햇살에 달구어진 몸에서 나는 냄새, 쌀이 누룽지로 익어가는, 맡는 것만으로도 허기를 채워주는 한 끼 밥 같은 냄새, 그래서 긴 시간을 길 위에서 헤매 다니다 드디어 집을 얻고 이제 죽을 때까지 정착해도 좋다는 신의 허락을 받는 자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 같은, 기쁨과 설렘과 피곤함과 무기력과 나른함과 편안함과 약간의 권태와 약간의 자만이 불규칙하게 뒤섞여 있는 당신의 냄새가 내 코를 가득 채우면 나는 무지무지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당신의 그 냄새를 나에게서 맡았을 때 그 기분 째지는 느낌을 아시려나.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것은 내 안에 겹겹이 쌓여있는 당신과의 순간들에게서 발효된 냄새,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냄새입니다.  죽음 앞에 이별 앞에 당당할 수 있게 만들어준 냄새. 평생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혼자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어준 냄새. 당신 없이 사는 순간들을 선택할 용기를 준 냄새. 당신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당신의 삶으로 거침없이 훨훨 날아가기를 기원하고 응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 냄새는 내 생이 완성한 최고의 걸작이지요.     


냄새는 자연, 인간, 생명, 존재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시간을 충실히 달려오면서  순간순간 얼마나 푸르렀는지, 눈부셨는지 빼곡히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냄새는 그들이 살기 위해 수고한 순간의 땀방울과 핏빛 안간힘을 세심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잠시 내 냄새, 우리의 냄새를 맡고 나니 좀 움직여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몸도 많이 가벼워진 듯 했어요. 목을 길게 빼고 방 안을 둘러보니, 다들 급하게 나가느라 그랬는지 좀 지저분하더군요. 여기저기 짐 가방들이 흩어져 있었고 특히 당신의 소지품들이 많이 보였죠. 당신은 모든 걸 다 갖추었지만 청소는 별로였어요. 하긴 하는 일이 넘 많은데다 원래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는 법이잖아요. 

      

나는 짧은 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서 사방에 흩어져 있던 당신의 머리카락부터 모았어요. 거기서도 향처럼 당신의 냄새가 피어나더군요. 나는 너무 좋아서 순간 힘이 불끈 났어요. ‘오케이 치워볼까’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온몸이 휘청하면서 눈앞이 핑 돌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군요.  예전에는 가끔 나타났었으나 요즘 갈수록 빈번하게 출몰하는 증상이었죠.  당신한테 들키지 않고 잠자듯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나의 마지막 미션이 성공할 수 있을까 순간 불안해졌고, 갑자기 몸이 또 확 무거워져서 나는 좀 자야겠다 눈을 감았습니다.      


어두워졌던 세상이 밝아지면서 갑자기 바다가 보였습니다.  여행 첫날, 우리가 함께 갔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바다. 신기하게도 하늘이 땅위로 내려앉은 것 같았던, 거기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 같았던 그 눈부신 블루의 세계가 내 눈앞에 다시 펼쳐지더군요.  푸른 바닷가에서 나는 당신을 따라 달리고 달렸어요. 사실 좀 귀찮았지만 블루의 힘 덕분인지 마치 초능력이라도 생긴 듯 나는 당신과 나 잡아 봐라 놀이에 파도랑 썸 타기 놀이, 술래잡기 놀이까지 소화했지요.  그러고도 당신과 하얀 모래사장까지 걸었는데 바람과 하늘과 바다와 땅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세상 풍광이 너무 멋지긴 했지만  엄청 센 바람이 숏다리라 내 몸과 너무 가까이 있던 모래들을 일으켜 사정없이 내 얼굴, 눈, 몸에 갈겨 댔습니다. 거기다 파도소리, 여기저기서 울어대는 새소리까지 다들 왜 그렇게 목청이 좋은지 나중에는 혼줄이 나갔다고 할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바닷가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던 당신 어머니 곧 할머니 옆에 찰싹 붙어서 당신이 모처럼 아이처럼 신나게 노는 모습, 환하게 웃는 모습을 구경만 했지요.  한참을 보고 또 봐도 너무 좋았던 당신의 밝은 모습은 눈물까지 날만큼 좋았어요. 그놈의 모래 시끼가 내 소중한 큰 눈에 마구 침입해서였기도 했지만 최근에 본 당신 모습 중에 당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가장 살아있는 것 같아서, 자꾸 눈에서 물이 줄줄 새더군요. 그러면서 여러 생각들이 사정없이 밀려왔는데 당신은 원래 저런 거 하면서 세상과 놀 나이라는 생각,  아직 가장이 되고 엄마가 되기에는 더구나 병든 노견의 엄마가 되어 그 망가지는 몸 뒤치다꺼리하기에는 너무 푸르른 시기라는 생각, 벌써 죽음과 병과 이별에 일상이 집어 삼켜지는 나날을 살기에는 아직 꽃띠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사실 그때 나도 모르게 결심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늙으면 눈물도 많아지고 눈도 자주 따끔거려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어요. 그랬더니 이번에 나는 달리는 차 안에 있더군요.  차를 타면 내가 어딘가로 보내지는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차 안은 내게 두려운 장소였습니다. 차만 타면 벌벌 떠는 나를 당신은 언제나처럼 안아주다가 그날은, 두 팔로 높이 안아 창유리 위로 들어 올려주셨지요. 그동안 여러 차례 말해서 대부분 아실겠지만 난 매우 숏다리라서 당신이 운전하던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을 때면 창이 닿을 수 없는 성의 꼭대기처럼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 창 밖 풍경이라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선지 그날 차 안 더구나 달리는 차 안에서 내다본 세상은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햇살이 따스한 시간이어서 당신은 신기해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창유리를 내렸고, 그 너머로 차갑지만 시쿰하고 경쾌한 바람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달려와 내 몸을 기분 좋게 핥아 주었지요. 헐 다들 어떻게 그렇게 빨리들 달리는지! 현기증이 날 만큼 쏜살같이 내달리는 세상 풍경들, 한꺼번에 여러 개의 풍경들이 겹쳐서 마치 별천지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던 그 특별한 체험을 혹시나 조금이라도 놓칠까 나는 정신없이 창밖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제법 긴 시간이었을 텐데 당신은 3kg를 육박하는 나를 당신의 가는 두 팔로 내내 들어 올려 주었고, 나는 너무 신나서 당신 걱정할 겨를도 없이 그 아름다운 풍경을 탐닉했습니다. 하늘과 햇살과 나무와 바람과 건물과 사람과 차와 당신의 노력이 만들어낸 천상의 풍경들은 나의 생이 그날 이후와 이전으로 나눠질 만큼 내게 강렬한 추억을 안겨다 주었죠.      


그제야 인간들이 놀이기구를 왜 그렇게 좋아라 하면서 타러 가는지 이해되었습니다. 특히 내 첫주인이 놀이기구 타는 걸 좋아했었죠. 첫주인이 그 작은 몸으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안고 마치 자동차처럼 나를 여기저리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떠오르자 문득 그 몸에 배어있던 꾀죄죄하고 짭짤했던 그리운 냄새가 생각났습니다. 그땐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첫주인이 내 주인이 되었을 때가 10살 11살 쯤이었더군요. 

그래서 첫주인은 나를 안고 잘도 넘어졌고 툭하면 나를 떨어뜨렸고 목욕을 시켜줄 때도 귀에 물이 잔뜩 들어가게 했고, 산책을 나갔을 때도 친구를 만나면 나를 길가에 묶어놓고 지들끼리 한참을 놀고 했었던가 봅니다. 

그때는 주인이 처음이라 다 이런가 보다 하면서도 뭔가 짜증이 났었던 것 같아서 가끔 고맙다는 말 대신, 불만의 시선으로 첫주인을 째려보기도 했었지요. 그의 은혜를 이제야 너무 늦게 알게 되다니... ‘미안해. 그 어린 몸으로 나를 키워줘서 고마워.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있겠지? 어려서부터 워낙 잘 생겼었으니까 인기도 많을 텐데 결혼은 했을라나...‘ 아직도 그와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목에 가시처럼 나를 아프게 합니다. 바람아 하늘아 전해주라. 나는 잘 있다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나를 잊어도 좋으니 너만 잘 살라고. 언제가 저 하늘 너머 노란 튤립 같은 곳에서 다시 꼭 만나자고. 그때는 내가 니 엄마 되어주겠다고.‘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신나게 즐겼나 봅니다. 피곤해서 나는 다시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이번엔 산속 할아버지 묘가 눈앞에 펼쳐져 있더군요. 그곳은 여행 첫날 첫 도착지였는데  할아버지 묘를 향해 모두 절을 할 때는 나도 끼워주어서 엉거주춤 몸을 엎드렸는데 식구들 사이에 당당히 위치한 나를 느끼고 살짝 감격의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래서 식구답게 새나 벌레를 봐도 짖지 않았고 냄새 맡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않고 얌전히 눈치 보면 자리를 지켰어요. 나만 쏙 빼고 음식을 나눠 먹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다가가 눈으로 항의하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냥 할아버지가 묻혔다는 땅 속을 향해서 죄송했다고 사과했어요.  어린 잔디의 풋풋한 냄새가 너무 향기로워서 코를 박고 냄새를 맡다가  문득, ‘나도 죽으면 이런 잔디 아래, 당신 가족들의 냄새가 가득한 이 땅 아래 아무데나 묻히고 싶다.’ 는 생각이 들면서 ‘이 말을 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다가 순간 좀 야속했습니다. 왜 인간과 개의 말을 다르게 만들어 놨을까요.  다 이유가 있겠지만 개도 감정과 생각이 있는 존재이고 특히 사람이랑 같이 살게 만들어 놓고  더구나 개가 죽으면 보통 주인인 인간이 뒤처리하는데 

뭔가 유서 같은 것을 전달하게는 해 줘야하는 거 아닌가. 그새 당신의 문제제기 하는 습성을 닮았는지 발끈하다가 다음 순간 마음이 확 무거워졌어요. ‘내 죽음이야 어떻든 상관없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무겁지 않기를 제발’ 나는 습관처럼 또 당신의 신께 빌었어요.       


돌이켜 보니 그곳에서 보낸 시간,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소풍 온 듯이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아 밥을 먹었고 

할머니와 당신 가족들은 묘 주변 밭에서 호박, 고추, 깻잎 등 이것저것 채소들을 수확했었지요. 가을은, 자연은 인간에게 한해의 수고로움으로 완성한 열매들을 아낌없이 나눠주었고 그것들을 선물 받는 인간들의 얼굴은 저들한테 저런 얼굴이 있었어? 놀랄 만큼 해맑고 귀여웠어요.      


그 중에서 가장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모처럼 길게 외출한 당신은 시원하고 구수하고 청명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안으며 날다람쥐처럼 여기갔다 저기갔다 했었지요. 당신은 묘 뒤의 제법 높은 지대에 있던 감나무에까지 올라가서, 어여쁘게 영근 감들을 두둑이 품에 담았는데 그때 당신이 보여준 아름다운 미소는 너무 눈부셔서 눈을 잠깐 감아야 할 지경이었어요. 당신은 그날 종일 웃고 있었고, 나도 당신을 따라 많이 웃었습니다.      


당신 얼굴빛깔처럼 발그레한 감을 들고 내게 다가와 냄새를 맡게 해 준 후, 하늘을 보면서 당신이 감탄사처럼 내뱉었죠. “아 행복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내 검은 눈동자와 더 검은 코와 더더 검은 입술을 차례로 응시하고는 아이처럼 큭큭 웃었고 내 토끼 같은 귀와 뽀송뽀송 솜털처럼 자라고 있는 등의 털을 마사지하듯 만지면서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어요. “이랑 너도 좋아? 너도 행복한 거지?”      


그때 당신의 행복한 얼굴을 보다가 행복은 자연의 열매들처럼 우리가 봐 주기를 따 주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  늘 깨어 발견하고 수확하지 않으면 다음 순간 떨어져버리거나 썩어 버리는 어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가 발견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 발견이 쉽지 않다는 것이고,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려면 멀고 험한 산들을 넘고 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고 이 나이에 도달한 내가 참 수고했다 느껴졌고, 그러자, 내 생을 수놓았던 수많은 길들, 순간들이 모두 행복으로 가는 크고 작은 산이었구나 그 등반의 과정에서 내가 흘린 땀방울, 눈물, 기다림, 상처들이 내 행복을 열매 맺게 하는 거름, 물, 산소 였구나 알게 되었고, 이제 잘 익은 열매들을 따기만 하면 되는 이 늙음이 참 축복이구나 깨달아졌습니다.      


늙음이란 말은 뭔가 슬픔이나 안타까움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나이듦으로 표현할까 봐요. 

나이듦은, 내가 알기론 절대 부정적인 일만은 아닌 것이 나이 들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단언컨대 삶이 지금처럼 눈부시지 않을 겁니다.       

나이 들어 보니. 나이 들어가는 일은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나이듦은 젊음과 다른 가치, 시선, 온도, 속도를 가진 또 다른 삶의 방식이더군요, 나이듦은 또 다른 힘이고 또 다른 성장이며 또 다른 끝이자 시작이더군요.      


내 나이 든 몸, 황홀한 먹이들 때문에 정신줄 놓은 나날들로 인해 올챙이 몸매가 되었다고 당신이 놀렸던 내 몸, 좀 많이 나온 배와 온 몸을 덮친 주름과 여기저기 피어난 검버섯과 흰 털들, 자주 충혈 되는 눈과 이미 오래전 빨갛게 채색된 발가락 피부, 나는 이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내 삶, 당신과의 시간들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고 당신의 시선이 머문, 당신이 손길이 닿은, 당신의 냄새가 스며든 자리들이자 우리의 생이 씨앗으로 뿌리내린 장소 곧 우리의 세월과 추억이 발효된 곳이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웃음으로 배부른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할아버지가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도 웃고 있었는데 그래선지 처음엔 못 알아볼 뻔 했어요. ‘할아버지가 저렇게 잘 생겼었나. 근데 왜 할아버지가 보이지? 

 헐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다음 순간 눈을 뜨니, 바다가 보이는 그 집, 그 방이더군요.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저 너머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곧 ‘저녁이 오겠구나 바람도 제법 차가워졌구나’ 생각하다가 ‘내가 기절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깨닫자마자 통증이 일제히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어요.  다행히 혼자라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어서 이것도 행복이네 생각하다가 나에게 다짐하듯 말했죠. ‘아직 안 돼. 아직 당신이 회복이 덜 됐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랑 정신 차려 곧 당신이 올거야 당신이 오기 전에 괜찮아져야 해‘     


나는 기력을 찾기 위해 다시 잠을 억지로 청했습니다. 내 몸은 기특하게도 잠을 자 주었고 얼마 후 눈을 뜨니, 창 너머로 해가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있더군요. 붉은 해가 푸른 바다로 다이밍하듯이 낙하하는 그 광경이 너무 황홀해서  넋 놓고 보다가 문득 통증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식은땀도 사라지고 컨디션도 나아진 것 같아서 나는 아싸! 기합을 넣고 당신의 신에게 감사인사를 날린 뒤 가볍게 방안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한 바퀴 더 돌까 하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어요. 나는 극복해보자 생각하면서 다시 방을 한 바퀴 뛰었는데 몸은 괜찮은 것 같더군요. 그럼에도 마음이 착 처지고 온 몸이 심하게 가려워지더니 춥지도 않은데 떨리기 시작했어요. 왜 이러지?’ 나는 바로 알아챘습니다. 그건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성난 파도처럼 몸과 마음을 덮쳤고 나는 혹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불길해하면서 방안을 왔다 갔다 했지요. ‘왜 이렇게 안 오지? 해지기 전에 온다고 했는데’ 한참을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렸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당신의 신에게 기도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당신이 들어왔습니다.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미친 듯이 당신에게 달려가 안겼고  당신도 격하게 나를 안아 주었는데 그때 당신의 몸은 몹시 떨고 있었지요.  ‘뭔 일이 있긴 했구나. 왜 슬픈 예감은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그날 우린 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신 어머니가 넘어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 후 당신은 일하랴 간병하랴 집안일 하랴 내 엄마 노릇하랴 훨씬 많이 바빠졌습니다.      


인간의 병원에 갈 수 없는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홀로 지내는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당신은 나를 볼 때마다 연신 미안해했지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그제야 마음 놓고 당신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아플 수 있었거든요.      


바쁜 당신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일단 나 혼자 잘 지내기라도 하자 결심했고 처음으로 당신에게 밥 잘 먹는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걱정이라도 안 하게 하려고 당신이 집에 있는 시간에는 늘 과도하게 웃었고그런 나를 보며 ‘이랑 징그럽게 왜 그래?’ 하면서 당신도 피식피식 웃었어요. 하지만 생은 특히 인간의 생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더군요. 할머니가 수술을 하면서 예상보다 비상사태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피곤이 고이고, 다시 얼굴이 훌쭉해지고 창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당신이 나한테 말도 없이 사라지기 전 그때 모습처럼.     


나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수십 차례 눈으로 말했건만 당신은 나를 보살피는 일까지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날씨가 추워지는데도 내 산책만을 꼬박꼬박 챙기면서

할 거 다 해주고도 매번 미안하다 했지요. 무슨 일이 더 생길까 조마조마해 하느라 내가 통증도 못 느낄 지경이 될 즈음 마침내 당신이 심한 몸살감기로 몸져누웠어요.  어느 추운 날 나를 기어이 끌고 산책을 갔다 온 후였지요.  

     

끙끙 소리 내어 앓는 당신 옆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끙끙 소리 내어 고민하고 있는데 당신 언니 가족들이 왔어요.  나를 며칠 데려 갈테니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앓지 말고 며칠 입원하라는 당신 언니의 말을 

괜찮다며 단번에 거절한 당신 모습에서 불현듯 한 고집하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어요.  목이 잠겨서 소리도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도 나를 절대 아무데도 보내지 않겠다며 자기는 곧 나을 거라며 똥고집을 피우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제 내가 결단을 내릴 순간이 왔음을.      


몇날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아픈 것 까지 들켜서 동물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일까지 날 간병하는 일까지 겹치면 당신의 겨우 회복되고 있는 몸은? 혹시라도 당신이 다시 아프게 될까봐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당신은 병원에 강제로 실려 가기 전에는 날 챙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분임을 알기에 이제야 내가 뭔가를 할 순간이 왔구나.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미안해하는지 세상에 보여줄 때가 비로소 왔구나 직감했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내 생의 중심을 잡을 기회를 마침내 주시는구나. 나는 당신의 신께 내 결심이 실천으로 굳건하게 나아가게 해 달라 간청하며 생각을 끝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별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니 시간만 좀 앞당기는 것 뿐인 거였죠. 나는 또 몇날며칠을 곰곰이 최선을 다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별하지? 어떻게 해야 당신 같은 고집쟁이가 이별을 수긍할까.’  결론은 내가 인간과 살 수 없는 폐륜개가 되는 것이었고 결심이 서자마자 나는 일명 정떼기 작업에 가열차게 매진했습니다. 산책길에서는 개든 인간이든 보이는 대로 더욱 더 미친 듯이 짖었고 집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밤낮으로 우렁차게 목이 쉬도록 짖었어요. 그리고 비상시에 나를 대신 봐 주러 온 당신의 가족들은 물론 당신 친구들 급기야 당신까지 물어버렸습니다.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아파트 민원이 이어졌고, 당신조차 옆에 두지 않는, 당신조차 키울 수 없는 문제견이 되기로 한 내 목표는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밤, 당신이 울면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이랑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호소했을 때 내 마음이 훅 넘어 갈 뻔 했습니다. 힘들어서 까매진 얼굴 위로 당신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봤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차라리 죽는 게 덜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당신이 애절한 표정으로 ‘이랑 그러지 마 제발’ 했을 때 간절한 눈빛으로 ‘이리 와’ 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당신의 그 손을 잡고 싶은 마음, 

그 손에 내 얼굴을 비비고 당신 품에 안겨 당신 냄새를 실컷 맡고 싶은 마음, 함께 잠들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듯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내 몸이 당신에게 확 기울었지요. 하지만 난 당신의 그 손을 잡는 대신 그 손을 꽉 물어 버렸습니다. 그때 당신의 코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 붉은 피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지금은 무조건 떨어져 있기. 잠시가 될지 영원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 당신을 무조건 최대한 쉬게 해야 함.’ 나는 그 붉은 피를 향해 충성 맹세하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내 마음이 너무 쨍쨍하게 깨어 있어서인지 밤의 세상과 매순간 미친 듯이 집중한 채 소통해서 인지

새벽이 아침이 아주 아주 천천히 오고 있네요. 아직도 하늘은 까맣게 그을려 있고 나는 그 검은 빛에 깊은 안도를 느낍니다. 언제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이 아름다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숨도 못 잤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네요.     


내가 온몸으로 보낸 이별하자 제안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훈련소 한달 가 있기’ 였습니다. 내가 갑자기 혼자 오래 있게 되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잠시 개들도 사람도 많은 새로운 곳으로 가서 기분전환하고 오라고  안 그래도 그동안 사회성이 갈수록 더 없어져서 고민되긴 했었던 터라 할머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겸사겸사 훈련도 받고 새로운 경험도 하고 오라고 당신은 다정한 눈빛으로 친절하게 말해 주셨죠.       


한달이라는 시간, 그 후에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성으로는 이 방법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것을 잘 알지만 그 사이, 내가 혹시 서둘러 잠을 자듯 이 세상과 작별하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최선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그렇게 당신의 신께 기도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놈의 마음은 이 망할 놈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있습니다. 다시는 당신을 못 본다 생각하면 심장이 후들거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그래서 지금은 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언제 행복한 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마디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행복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행복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젤 행복한 지 알려달라고 하셨죠.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 사는 것을 볼 때입니다.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 당신답게 아직 몸이 허락하는 날들 동안 미리 집에 갇혀 있지 말고 당신의 몸과 마음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곳으로 무조건 나아가시길. 누구 때문에 당신의 생을 희생시키지 말고 오직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사시길. 다른 희생은 당신의 선택이니 내 관여 할 바 아니지만 나 때문에 희생하는 건 절대 결단코 싫습니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거고 싫은 건 싫은 개이고 좀 고쳐 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다 늙어서 무슨, 그냥 생긴 대로 살다 갈 작정입니다.      


모두들 우리 둘이 닮았다고 하는 거 알죠? 당신이 고집쟁이인 만큼 나도 고집쟁입니다.        


오늘 당신과 이별할 때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혹, 당신이 나를 걱정한다면 염려한다면 나는 괜찮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우리의 시간들 동안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게 저축해준 당신의 냄새, 우리의 냄새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당신과 함께 살면서 매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빵처럼 구어 왔는지, 아마 당신은 모르실거예요. 그 이야기들은 나이듦으로 인해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이제 하나씩 하나씩 맛있고 건강한 다양한 빵들로 내 안에서 잘 익어가고 있어요. 그것이 내 남은 생, 몸과 마음이 굶주리지 않도록 지켜줄 거예요.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제발 나한테 하는 만큼만 당신 자신을 돌보면서

건강하게 지내시길.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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