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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Oct 24. 2021

그녀에게

10. 오해

안녕. 나의 그대     


오늘,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여기 오자마자 곯아떨어져서 여러 날들을 잠과 함께 보냈습니다. 중간 중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 것도 같았지만 그 무엇도 나의 잠을 방해하지는 못 했습니다.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푹 자서 그런지 머리도 개운하고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운 것 같습니다. 내 피곤의 핵심이 불면이었나 싶을 만큼 컨디션이 나아졌어요.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 걱정은 마세요. 당신은...  어떠신지?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그냥 잘 있겠거니, 감기몸살도 다 나았으려니.. 생각하렵니다.     


우리는 지금 이별 중이니까요... 내 남은 최대 과제는 혼자서 생을 씩씩하게 잘 마무리하는 것. 나는 내 생의 마지막 미션을 최선을 다해 해낼 생각입니다.      

     

당신 없는 생을 내 멋대로 선택해 놓고, 당신 마음을 매몰차게 뿌리쳐 놓고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당신에게 편지를 또 쓰는 이유는 당신에게 알려드려야 할 말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 옆에 없는 동안 내가 나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나에 대한 다른 이야기, 내 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야 할 존재, 알 자격이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이 좋았습니다. 당신을 보자마자 마음이 날뛰기 시작하더니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리고 맥박이 파도타기 하듯 출렁거렸습니다. 첫눈에 당신에게 반한 거지요. 인간들 표현으로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 할까요.           


당신은 따뜻했고 다정했고 부드러웠고 섬세했습니다. 좀 다혈질이고 마음이 약해서 거절을 잘 못해 갈등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지만 손해도 잘 보고 실수도 잘 하고 빈틈도 많아서 많은 경우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불안했지만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이 마음은 당신과 살게 된 후부터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텅 비어 있던 내 생에 주인공이 생긴 것 같은 느낌, 덩달아 나도 공동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 생이 늘 벅차게 감사했지요. 인생의 사랑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행운인지, 보자마자 알았고 살면 살수록 확신을 넘어 신앙처럼 굳건해지는 사랑을 가진 생이 얼마나 기적인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 없는 낯선 곳에서, 내가 그렇게 오래 잠을 자다니, 달디 단 잠을 자다니. 거기다  이렇게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다니, 온 몸이 가벼워지고 숨쉬기도 편해지다니... 처음 그 사실을 깨달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러다 이성이 조금 작동되면서, 아 내가 그동안 너무 힘들었구나 감정을 숨기는 것도 힘든데 아픔까지 숨겨야 했으니 진짜 극기 훈련 같았겠구나. 인간도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는데 개의 몸으로 숨기려 안간힘을 쓴 후유증 같은 거구나.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왜냐면 이제 당신이라는 초능력을 잃어버린 나는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심하게 흔들리게 될 테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내 생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개미만한 충돌조차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거든요.      


그렇게 서둘러 타협하고 창으로 가서 며칠 만에 하늘을 봤는데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잔디는 또 왜 그렇게 초록초록한지 반갑더군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풍경도 눈부시고 어디선가 살랑거리며 불어와 내 코를 건드리는 바람도 시원해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는데 그러자 저절로 ‘아 상쾌하다’ 감탄사가 새어나왔지요. 그리고 연이어 내가 중얼거렸어요. ‘아 살만하다.’ 


그 소리를 내 귀로 듣고 나는 한순간 얼어붙었어요. ‘내가.. 지금 살만하다고?.. 당신이 없는데도 내가? 

그때 창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요. 당신 집에서는 거의 다 죽어가는 몰골이었던 내가 멀쩡해 보이고 내 말 그대로 제법 살만해진 것 같았지요. 잠시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어느 순간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어요. ’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혹 그새 통증이 없어졌나? 그래서 살만하다고 느끼는 건가?‘  아니었어요. 통증은 어느새 생의 동반자처럼 익숙해진 것일 뿐 아픔은 변함없이 나와 함께였지요. 그렇다면 이 죽일 놈의 통증마저 견딜 수 있을 것 같게 하는 이 느낌은.. 뭐지?     


이른 새벽에 시작된 하루, 그 어느 날 보다 길고 길었던 오늘 하루, 나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신 없는 내 생은 불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당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숨 쉴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당신을 모질게 떠나왔습니다. 당신 곁에서는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어져서, 당신 없으면 내 생이 금방 끝나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까지 하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혹 내가 치맨가? 생각하다 당신이 몇 년 전부터 치매예방약까지 먹였는데 설마 하며 생각하다 갑자기, 개든 사람이든 치매에 걸리면 본능이 살아난다고 내가 치매 걸리면 강아지계의 먹보대마왕이 될거라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당신이 놀리듯 내뱉었던 말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혹시 하면서 먹는 것을 생각 했는데 먹는 생각만 해도 입맛이 싹 달아나는 걸 느끼고는 치매가 아니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살다보니 먹는 것을 질색하는 희한한 경험을 하는구나 순간 신기했지요. 나는 그날 하루를 순도 100% 생각에만 투자하면서 최대한 감정은 배제하고 그동안 내가 획득한 이성을 총동원하여 나를 정면으로 배반한 내 몸의 반응에 대해, ‘사는 일이 쉬워진 이 느낌’에 대해 계속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다시 어둠에 파묻힌 어느 순간, 벼락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혹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나는 사랑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가...  내가 힘들다고 아프다고 도망가는 건, 사랑이 아니니까요. 그 존재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주고 있다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요. 고통과 희생, 인내와 상처는 사랑의 기본값이고 그 기본값 덕분에 생이 살만해지는 게, 사랑이니까요.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순간들이 즐겁고 사랑하는 이의 웃음을 지켜줄 수 있다면 불구덩이도 기쁘게 뛰어드는 마음, 뜨거운 불구덩이를 사랑이 수여한 훈장으로 품고 그 훈장만으로 생의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니까요.   


나는 사랑을 염원했고 자신했지만 실은 사랑 불구였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덩이가 사라진 이 느낌, 내 어깨에 들러붙어 있던 천 톤짜리 거머리가 없어진 것 같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일,  당신이 행복한지 외롭지는 않은지 틈틈이 블루와 노닥거리는지 아닌지, 마음이 고단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은지 일일이 챙기고 내가 혹 도움이 될까 뭘 해야 하나 고민하고 혹 사고라도 날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마음 조리며 잠 못 자고 아플까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걱정하는 일.. 그 일들, 매일 반복되는 그 일들은 때때로 내 몸무게의 천 배 만 배의 짐을 지고 내 짧은 다리로 인간들도 헉헉대는 엄청 높은 산을 등반하는 일 같기도 했습니다.        

당신처럼 자유롭고 거침없는 사람 달리 말하면 변덕 심하고 기분파라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사람, 거기다 자기 주관 뚜렷하고 자기주장까지 센 당신 같은 사람이 매순간 잘 지내기를, 매순간 행복하기를 바라는 일, 오래 내 직업이었던 그 일은 아주 간혹 극한 직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그래선지 어느 순간순간 등이 휠 것 같았고, 딱따구리가 머리를 쪼아대는 편두통에, 앰블란스 사이렌 불빛처럼 벌렁거리는 심장병 증상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고,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이 사라진 일상은 허무와 상실,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뒤범벅된, 형벌 같을 줄 알았습니다. 

물론 마음껏 아파도 되고 언제 어떻게 죽어도 괜찮다는 느낌에서 오는 자유로움 무엇보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떡하지 라는 답을 모르는 문제를 더는 안 풀어도 되는 홀가분함 정도는 백번 양보해서 나도 생명인지라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아 살만하다’가 감탄사처럼 새어나오는 상황만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사랑을 할 만한 용량이 되는 개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사랑인 척 나를 속이고 혹.... 당신을 이용한 걸까요? 그것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 몸의 반응이 나의 진실이라면 현재까지 확실한 건, 어쩌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당신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해준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니까요.           




내가 성숙해진 줄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과 살면서 당신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딱 두 번 보고  나를 집으로 턱하니 데려 온 당신의 용기도 멋있었고 엄마가 뭔지도 모르면서 엄마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당신의 모든 순간들도 멋있었고 내가 어떤 놈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영원히 사랑할거라 고백하던 치기도 멋있었고 작고 약한 몸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떠돌고 싶어 하는 열정도 멋있었고 돈 많이 벌어서 세상의 모든 유기견들에게 집을 만들어 줄 거라는 창대하지만 무모한 꿈도 멋있었고 내가 좀 편해지자 오로지 먹는 생각만 하면서 인간들을 먹이 주는 호구로만 생각하는 걸 눈치 챘으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귀여워해 주는 아량도 멋있었고 할아버지가 떠난 후, 사랑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마음도 멋있었고 산책 갈 때마다  사료를 들고 나가 길고양이들의 밥그릇을 챙기면서도 그들에게 미안해하는 약간은 결백증 같은 마음도 멋있었고 생을 자신을 위해 쓰면서도 중간 중간 멈춰 서서, 나 같은 생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을 나눠주는 그 배려심도 멋있었고.....  


당신을 보면서 나만 아는 존재에서 너, 우리, 세상도 아는 존재로, 느낌이나 감정이 전부인 존재에서 생각도 하고 실천도 하는 존재,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의미 있고 숭고한 가치를 나누며 사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개라도 품격을 아는, 무엇보다 성숙한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스런 사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끝내 지키는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조차 감미로운 사랑, 짓궂은 농담 같은 생의 구석구석을 사랑으로 껴안고 당신 운명의 고단함을 치유하는 사랑, 그를 통해 내 생도 구원받는 사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감히 나는 그런 사랑을 꿈꾸었고 그래서 헌신과 기다림으로 일구어지는 사랑의 논밭에서 세상 가장 성실한 농부가 되고자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욕심이었습니다. 당신 없는 세상에 던져지니,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습니다. 잘 있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그건 예상보다는 괜찮은 것일 뿐 사실 나는 당신이 보고 싶어 밤마다 마음이 요동을 칩니다. 그냥 당신 품에 안겨 당신 냄새를 맡고 싶고 통증이 심할 땐 아프다고 징징대면서 인간 아기들이 엄마한테 하는 짓을 그대로 당신에게 하고 싶습니다. 아프다는 걸 핑계로 당신 옆에 짝 붙어서 종일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고 내가 당신 생의 1순위이길 신께 빌고 또 빌고 싶습니다. 


특히 밤에 더 심하지는 가려움증 때문에 밤이면 당신이 환장할 만큼 그립습니다. 매일 밤 자기 전 당신이 빗질해주고 긁어주던 내 몸 구석구석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세상을 뚫을 듯 아우성을 처대고, 아침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온 몸이 빨갛게 부어있습니다.  당신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붉은 피부를 볼 때마다 스산함이, 한기가 몰려오고, 내가 혼자 죽을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고, 괜히 생각이란 걸 하게 되어서 이성이란 걸 얻게 되어서 왜 이 생고생인지, 그냥 개답게 생긴 대로 살 것이지, 나 자신을 원망도 했습니다. 성숙이고 나발이고 다 취소하고 이성이고 뭐고 다 반납하고 결국 그냥 철없는 개라는 것을 인정하고 ‘당신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을꺼야’ 생떼를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었던가. 어른스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개가 되고 싶었는데.     

 

주제넘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별로라서 그냥 고만고만한 개라서 그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몸이 본격적으로 아픈 후, 통증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늘어나면서 통증을 느끼는 매 순간마다 나는 절감했습니다. 성숙은 개뿔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풋내 나는 개였어.’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습니다.   

        

여기, 이곳에 와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내가 오래 전에는 살고 죽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더군요. 살아가는데 생각이 별 도움이 안 되는 개의 숙명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생의 방식과 과정을 선택하지도 못하고 생을 개척할 힘도 능력도 없는 개의 현실을 평화롭게 받아들인 나는 그래서 생의 모든 사건사고들 앞에서 무덤덤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러려니 하면서,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가 부다 만나면 만나고 헤어지면 헤어지는 가 부다...나는 생에 연연하지 않는, 생각 없이 막 사는 개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생에게 뭘 바랄 수 있었겠어요. 인간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사는 일, 죽는 일도 아침이 오고 밤이 오듯이 그저 과정일 뿐, 뭐 그리 큰 의미가 있나 했었고 죽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 같았습니다. 예전부터 나는 죽는 일이 노란 튤립 같은 곳으로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더군요. 그러니 그리 애달플 일도 서러울 일도 아니고 두려워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개로 사는 생. 별다른 기대도 미련이 없이 흰 눈처럼 담백했는데 그래서 죽음은 새로운 기회일 수 있어서 나는 많은 순간, 죽음이 구원일지도 몰라 생각하며 생을 버텼습니다. 내 네 발 다 인간에게 꽁꽁 묶어 놓고 마음까지 완벽하게 빼앗긴 채 살아야 하는 견생에서 죽음은 그 기막힘, 부조리를 단숨에 끝내 버리는 짜릿한 한방이기도 했던 거였죠.      


그랬던 내가 당신을 만난 후 확 변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생의 모든 것이 소중해지고 각각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감정들이 폭풍우 만난 바다의 파도처럼 통제불능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지요. 좋다 안좋다 기뻤다 슬펐다 널을 뛰기 시작한 그것들이 웃고 울고, 안달하고 포기하고, 집착하고 내려놓고 그러다 넘어지고 아프고... 하는 사이에, 그 말끔한 정장 같던 죽음이, 무겁고 비밀스러운 천년의 갑옷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이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 후, 당신이 내 죽음에 나보다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된 후, 나는 정말 죽음이 두려워졌습니다.           


당신 없는 이곳에서 죽음을 다시 생각하니, 예전의 그 마음이 되살아 나 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죽음은 지금의 내게 이 지겨운 통증을 끝내 줄 고마운 것, 내 힘으로는 절대 끝낼 수 없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단번에 끝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요. 여기서 죽음을 생각하니, 죽음은 생이 내게 준 휴가 같습니다.      

     

당신과 멀리 떨어져 마치 다른 우주에 와 있는 것 같은 지금, 당신이라는 태양이 거세된 그래서 마음의 온도가 차갑게 식어버린 지금, 늘 핑크빛 안개빛으로 보이던 세상이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항상 술 한 잔 걸친 듯 낭만적 기분에 취해있었는데 이제야 잃었던 시력을 회복한 것 같고 정신도 말똥말똥합니다.           


그러니 아직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몸을 억지로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나는 길 위로 떠나려 합니다. 중병환자로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면서 죽음을 기다리기는 싫습니다. 죽음과 화해한 지금,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음을 찾아 나서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한 달 후까지 내가 안 죽고 살아남는다면 그래서 당신이 나를 데리러 오면 아니 그전에 내가 아픈 걸 들켜서 당신이 일찍 온다면 그때는 절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길이 집이었던 시절, 나는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우주와 독대할 수 있는 하늘 아래가 좋겠다고. 지금 당신의 신께 기도합니다. 이왕이면 트와일라이트블루가 드리워진 길 위에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그러면 당신과 함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행복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감히 생각합니다. 나의 이 마지막 소망, 조금은 사치스럽다 해도 이 정도는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내 생이 그 정도 가치는 있지 않을까. 모든 생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생의 단 한 순간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당신도 나에 대해 내가 그랬듯이 오해하고 있었다면 부디 그 오해를 바로 잡으시길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개라서. 

늘 쿨하게 살고 싶어 했던 당신, 나를 쿨하게 잊어버리고... 

부디 건강히 행복하게 잘 지내시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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