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he ME, stupid
“답답해”, “답답해”, “답답하다고”, ... “안 답답해?”
고요한 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다.
그곳이 어딘지는 이제 찾아보지 않아도 안다.
내 마음 안이다.
나는 다시 길을 잃었다
‘너’를 사랑하는 길을 찾기로 했다가, 그래서 내 생의 마녀서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가
그러다 ‘너’의 탄생서사를 발견하고, 길을 잃었다.
‘신은 내 생 어딘가에 도돌이표를 심어 놓은 게 틀림없어.’ 나는 무심하게 내뱉는다.
코코를 산책시키다가 길 잃은 백구를 보았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눈처럼 희고 순결했을 그러나 누런 아이보리색으로 변질되고 있는 털을 가진 개에게 나는 “백구야” 불렀다.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많았었는지 백구가 나를 쓰윽 돌아보았다.
파란색 목줄을 훈장처럼 매고서 백구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목이 타 들어왔다.
길게 입 밖으로 뻗어버린 백구의 붉은 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이어 허리띠를 바짝 졸라 맨 듯한 백구의 가는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못 먹고 물도 못 마신거야?”
내 질문을 알아들었는지 백구의 고개가 잠시 주억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어떡하지? 코코 물통이라도 들고 나올 걸.
내가 허둥대는 사이, 백구는 사람들의 경계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유히 걸어갔다.
푸른 초록이 넘실대는 나무들 사이로 백구의 동그란 엉덩이가 사라졌다.
나는 마치 신기루를 본 듯 황망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구는 순하디 순한 무해한 눈을 가졌지만 백구가 웬만한 성인 허리만큼 오는 큰 개라서
사람들에게 백구는 불청객이었다.
백구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코코 옆에 다가와 아주 잠시 냄새를 맡고는 네 갑니다 가요 하는 표정을 남기고 떠났다.
축 쳐진 혀에 비해 여유로운 표정을 가진 백구를 삼킨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물었다.
‘백구야 어디가? 혹시 마녀한테 가? 그럼 나도 데려갈래?’
이 무슨 나랏말싸미.. 서르 사맞디 아니 할세.. 같은 문장인가.
집을 잃고 헤매는 건 백구가 아니고 나인가.
아니 백구는 집을 잃은 것 뿐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데 나는 집 대신 나 자신을 잃은 건가.
문득 궁금해졌다. 백구가 진짜 여기 왔다간 게 맞나.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푸르디푸른 초록잎들은 진짜인가.
나의 멍 때리는 시간이 제법 길었는지 코코가 내 종아리를 지 얼굴로 툭툭 쳤다.
세월을 성실하게 주워 담은 코코의 얼굴에는 늙은 생명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나른한 피곤과 세상사 통달한 듯한 시크한 무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코코야, 뭔가가 진짜인지는 어떻게 알지?
기껏 순간밖에 가질 수 없는 주제에 우리는 뭘 그리 확신하고 염원하고 좌절하는 걸까?
내 생을 거쳐 갔다고 생각했던 그 무수한 시간들은 또 얼마나 진짜일까?
백구의 털색처럼 내 마음의 각색으로 변질되었을 수많은 내 생의 인간과 사건들은 단지 내 생에 실존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일까?
나는 사실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내 생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내가 상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억들에 대해
내가 나라고 확신했던 수많은 생각들 감정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는 봄꽃처럼 사라져 버린 주제에, 내 생에는 악착같이 들러붙어서
두고두고 내 순간들을 움켜쥐고 뒤흔들면서 ‘넌 내꺼야’.. 발악하는 것들에 대해
사실 그것들이 한 짓이라곤 내 생을 슬프게 외롭게 아프게 유지하느라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은 것뿐인 것 같은데 난 왜 그것들을 진짜라고 진실이라고 단언했을까.
한번 의심이 생기자 여기저기서 오래 참아왔는지 질문들이 폭주했다.
심지어 이런 질문까지 등장했다.
나는 왜 ‘나’인가.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과연 ‘나’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놈의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나’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에게 내 생의 절대반지를 부여했었다.
대체 언제부터? 왜? 누가?
그 정도 되자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혼돈이 내 생에 굽이굽이 넘쳐흐르는 느낌.
애써 질서정연하게 미학적으로 손색없이 매일매일 갈고 닦은 일상이
한순간 거대한 흙탕물에 점령당한 느낌.
정체모를 것들로 뒤엉킨 흙탕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본 적이 있는가.
원래의 모습은 한순간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에 박혀있던 무수한 애씀의 순간들이 허망하게 부셔지고,
전혀 새로운 무질서와 탁함과 더러움이 애초에 이곳은 내 것이니라, 영토 싸움 하듯 점령해 있는 광경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풍경을.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너’도 생겼고 ‘너’를 버릴 수도 있었던 혹은 버렸다고 믿었던 것.
그 출발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은 내 생의 모든 것들을 한순간 용해해 버리는 흙탕물이 되고 있다.
애초에 나에게 진짜가 있었나? 내가, 진짜라는 나의 믿음은 혹 환상인가?
이쯤 되면 다른 국면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무릎 꿇고 납작 엎드려 신에게 잘못했으니
다시 시작하게만 해 주소서 익숙한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수준이,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왔다.
내 생이 시작되던 그 순간.
그것은 평범한 한 인간의 출발지가 아니라 무지하지만 욕망만은 창대한 한 인간의 위대한 오해의 출발지가
아닐지. 내게 ‘나’라는 생각을 심고 ‘나’라는 감정을 뿌리고 ‘나’라는 신념을 맺히게 한 그 찬란하고도 남루한 시작지점이 아닐지.
백구가 사라진 푸른 길 앞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코코가 으르릉 거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작 그 순간부터야. 모든 것은 내가 내 생을 아니 ‘나’를 오해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코코를 보며 순진한 척 물었다.
“코코야 이 소리들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혹시 너니?”
“헐 이 바보, 어디서 들려오든 그게 뭐 중요해? 중요한 건, 문제는 너도, 마녀도 아니라는 거, 문제는 ‘나’라는 거 바로 그거라고. 사실 알고 있지 않았어?“
갑자기 순하디 순한 백구 눈이 떠올랐다. 나는 백구처럼 고요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천히 오래오래. 스스로 했든 누가 시켜서 했든 뭐에 홀려서 했든 협박당해서 했든 내 생의 서사는 ‘나’의 창작물이었다.
너든 마녀든, 결국 ‘나’의 창조물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어쩌면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코코야, ‘나’에 대해 혹시 뭐 알고 있는 거 있니?‘
길 잃은 느낌을 받을 때마다 횡설수설 물어대는 나를 코코가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좀 많이 절박해 보인 모양이었다.
코코는 내가 ‘지랄하네’로 해석하는 크릉크릉 소리 대신 닭살 돋은 내 종아리에 콧김을 쉬익 불어 주었다.
그 소리가 내게 워워 ‘진정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이런 말들이 날아들었다.
“이것도 알고 있었을 걸. 내가 신의 순수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 가혹한 운명의 가련한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적극적인 오해와 가열한 욕망과 가공된 기억과 달콤쌉싸름한 고통을 통해 생을
손수 빚어내는 에고의 친애하는 동반자 혹은 하수인에 가깝다는 걸.”
습관처럼 난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찾으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리는 늘 그랬듯 바람처럼 사라졌고 풀내음이 그 자리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습관처럼 난 운명의 희생자 같은 얼굴로 풀내음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자 코코가 격하게 컥컥거리며 내 몸을 밀어냈다.
풀내음인 줄 알았는데 코코 냄새였던가.
코코는 ‘더는 못 기다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혼자 걸어갔다.
코코의 엉덩이는 푸른 길로 사라진 백구의 동그란 엉덩이도 보다 더 동그랬다.
백구는 사라졌고 코코는 그곳에 있었다.
너도 마녀도 사라졌지만 ‘나’는 어디에서나 내 옆에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나’였다. 나는 그제야 오래 삼켰던 외침을 뱉어냈다.
“바보야, 문제는 ‘나’였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