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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Oct 08. 2022

10. 고양이 까미 1.

“코코야 같이 가.” 언제부턴가 코코가 나를 한참 앞질러서 혼자 가 버린다. 아마도 그날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 관계는 변했다. 매달리는 건 졸졸 따라다니는 건 나였다. 코코와 나는 서로의 자리를 바꿨다.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그날 이후, 내 마음은 일종의 재해 상태다. 그동안 근근이 개간해온 마음밭에 생각들이 감정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나마 변화가 있다면 그런 내 마음을 처음으로 관람하고 있다는 것. 덕분에 그동안 왜 출렁이는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엄두도 못 냈는지, 내 인생의 문제아가 ‘나’라는 사실과 마주칠 때마다 모른 척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았는지, 이 불편한 진실을 피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낯선 길들을 싸돌아 다녔는지, 나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생이 미약하나마 진전되어 온 것은, 아마 ‘너’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의 골칫거리들을 ‘너’로 떼어내어 내다 버리는 방식, 감당 못하는 것들을 나와 격리시키고 수용 못하는 것들을 ‘너’로 처리하는 방식은 내가 고육지책으로 잔머리를 굴려 강구한 방법들 가운데 가장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살아졌다. 내 안이 시끄러워서 소리에 질색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점에서 ‘너’는 내 생의 은인인 셈인가.      


그런데 그것이 고장 난 모양이다. ‘나’는 아군 ‘너’는 적군, 내 생을 버텨준 유일한 이 질서가, 오랫동안 자동으로 운영되어온 이 방식이 먹통이 됐다. 내 마음에 불순물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다시 내 안이 화해할 수 없는 소리들의 놀이터, 불협화음의 집결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익숙한 소리들을 생경하게 들으면서 몇몇 가지를 발견했다. 이 소리들이 그동안 내 생의 주인공이었다는 것. 그로인해 나는 아직 한 번도 ‘내’가 된 적이 없었다는 것. 생이 내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가 생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     

 

살기 위해 ‘너’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만 버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정작 버릴 것은 ‘나’였나? 근데 어떻게? 나를 어떻게 버리지?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군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불편해졌다. 혼자가 세상 편한 나였는데, 혼자 있는 게 나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해졌다. 처음엔 나를 피해 집을 나가 더 시끄러운 곳으로 갔다. 하지만 나는 안팎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에 거의 실신할 만큼 녹초가 됐다. 오랜만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중노동을 하고 있는 느낌, 과로사 할 것 같은 느낌에 흠뻑 젖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나에겐 코코가 있었다. 코코 옆에서 코코 냄새를 맡으며 코코를 보고 있으면 내 안이 좀 조용해졌다. 잡소리들이 일시적으로 음소거되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코코의 여유 자적한 영혼과 따뜻한 몸뚱어리가 필요했다. 약을 먹은 후로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코코는 여전히 북을 쳤고 북을 칠 때조차 평온했다. 내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을 만큼 쪼그라들었는데 그 작은 몸뚱어리는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 같았다. 나는 코코가 경이로웠다. 어쩌면 부러웠다. 급기야 나도 모르게 코코를 향해 소리쳤다. “코코 난 왜 이렇게 질척거리지? 대체 왜 갈팡질팡 허우적거릴까 구질구질하게 응?”   

  

코코는 이불 속에 깊숙이 얼굴을 묻은 채 동그란 엉덩이만 내게 들이밀곤 했다. “뭐냐 그 엉덩이는 혹시 엿 먹어 이런 뜻이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코코의 엉덩이는 미동도 없이 태연했다. 내가 아무리 큰 소리로 미친년처럼 방방 뛰어도 코코는 고요할 뿐이다. 그런 코코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어서 나는 코코의 몸에 내 얼굴을 비비고 뽀뽀를 해대고 안고 만지고 쓰다듬었다.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코코에게 개진상을 떨었다.  

   

내 마음이 의존을 넘어 집착으로까지 발전하자 무심하던 코코도 반응을 하긴 했다. 신음 같은 깊은 한숨을 간간이 내쉬더니 어느 날부터 으르릉 거리면서 내 스킨쉽을 차단했다. 하긴 지도 살아야 하니까. 나 같으면 확 물어버렸을 텐데. 역시 코코는 나랑 달랐다.      


늘 그렇듯 경계를 넘는 건 나였다. 나는 코코에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너를 사랑하기로 한 그 빌어먹을 기획 때문이고, 나도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내게 불어넣은 건 너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책임지라고. 코코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코코의 얼굴을 보면서, 너너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와중에도 나는 너를 탄생시키고 있구나. 내 몸의 운영시스템이 고장 나자 나는 내 몸을 벗어나서라도 너의 탄생서사를 생산하고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코코가 아팠다. ‘코코야, 같이 가.’ 산책 갈 때마다 내가 뱉은 이 말이 작은 산 하나를 가득 채웠을 무렵이었다.


코코는 심하게 배앓이를 했다. 아무것도 못 먹었고 열도 있었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추고 약을 받은 뒤 코코를 집에 데려온 날, 나는 코코에게 사과했다. 코코는 저 작은 몸으로도 세상을 품는데 나까지 품는데 내 문제조차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너’라는 절대적 힘을 가진 이름이 담당해온 나의 불순물들이 ‘너’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 코코에게 흘러 갔을거라 생각하니 코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난 안절부절못했다. 코코에게 나는 민폐덩어리였다.        


코코를 위해 코코와의 거리두기를 결심했다. 나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내 입에서 습관적으로 ‘코코 같이 가’란 말이 새어나왔다. 코코가 그리워서 나는 코코처럼 무욕의 표정으로 무해한 눈으로 하늘을 나무들을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더는 ‘코코 같이 가’란 말이 나오지 않던 어느 순간,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길임에도 새로운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의 키가 고개를 한없이 꺾어야 할 만큼 그토록 컸었는지, 그들의 피부가 그토록 투박하고 단단했는지, 나뭇잎이 그다지도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었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하늘의 안색이 그토록 파랬는지, 태양은 그토록 절묘한 각도로 빛을 꺾어 내게 보석 같은 햇살을 보내주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두가 그토록 근사했는지, 나는 비로소 발견했다.      


이 세상의 일원, 나의 이웃이었으나 내 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내 세계가 빈약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고. 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자연의 조각들이 코코의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하자 내 안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코코를 통하면, 코코가 사랑하던 것들을 경유하면 모든 것이 언제나 안전했다.      


나는 코코의 품 같은 자연을 향해 코코처럼 온 감각을 열고 코를 벌름 거렸다. 그리고 코코처럼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열어 제친 마음 사이로 온갖 냄새들이 넘실거렸다. 나무냄새, 바람냄새, 흙냄새, 풀냄새들로 나를 채우니 내 경직된 눈매가 코코의 순한 눈매를 닮아갔다. 자연 냄새들이 그토록 향긋했는지, 알싸했는지, 시원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자 냄새 너머로 자연의 소리들이 보너스처럼 딸려왔다. 특히 수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있지만 바람에게 일사분란하게 자신을 내맡길 때 나뭇잎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유쾌한 웃음소리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귀 기울여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그 소리는 낮은 옥타브를 유지한 채 가늘게 재잘거리다 어느 순간 자지러지듯 고음을 터뜨리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귀를 편안하게 하는 특정 볼륨을 절대 넘지 않는 균형감, 바람의 방향과 절묘하게 호흡하는 리듬감을 바탕으로 자유로움과 우아함을 연주하는 듯 한 나뭇잎들의 소리에 나는 멋진 합창을 듣는 듯 넋 놓고 빠져들었다. 소리가 시끄러운 대신 아름답고 싱그러울 수 있음을 깨달으며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뭔가가 토닥이는 손길, 부드럽게 내 몸을 두들기는 손길,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가 툭 열리는 기분, 오래 꽁꽁 싸매 놨던 보따리가, 몸을 옥죄고 있던 매듭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생, 내 몸을 감금하고 있던 딱딱한 각질에서 해방되는 기분에 휩싸인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소리들이 들려왔다. ‘괜찮아. 애쓰지 마.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마. 그냥 느껴. 이 생을. 온 몸으로.’ 나는 습관처럼 두리번거렸고 소리들은 이어졌다. ‘환영해. 너가 우리를 봐주길 기다렸어. 너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이 널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오해야.’ 그 순간, 내 몸이 나뭇잎들처럼 파르르 펄럭거렸다.      


며칠 후, 숲 속을 거닐고 있는데 내 안에서 뭔가가 툭 튀어나왔다. 내가 미쳐 볼 새도 없이 그것들은 밤톨처럼 바닥으로 세상으로 떨어지고 흩어졌다. 보지 않아도 난 단번에 알았다. 그것들이 미움이라는 것을.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걸었는데 이번에는 슬픔이 툭 떨어졌다. 그날 나는 많은 것들을 떨어뜨렸고 만났다. 불안을. 두려움을. 분노를. 고통을. 우울을. 상실을. 집착을. 그것들이 온전히 내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것들이 내 생의 친애하는 오랜 벗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생의 서사를 구성하는 파트너로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그것들은 내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있어준, 행복으로부터 나를 지켜온 나의 보디가드였다.


내 생을 서식지로 성실하게 개척하며 열매 맺고 있던 그것들이 가을 낙엽처럼 속절없이 나로부터 후드득 떨어졌다. 그 후 산책길에서 나는 밤처럼 낙엽처럼, 그것들을 흘리고 줍고 버리고 발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들이 내 안에 그토록 풍성하게 주렁주렁 탐스런 열매를 맺고 있었는지, 그렇게 흘리고 버려도 계속 흘리고 버려질 수 있는지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그러다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 난 놀랐지만 그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이.       


나도 그놈을 알고 있긴 했다. 그놈은 까만 고양이 까미였다. 아들 몽이와 우리 아파트 XXX동 아래 작은 공터에서 살고 있는 그 놈은 코코와 산책 나올 때 가끔씩 마주치곤 했었다. 그 사이 뭔가 분위기가 달라져 있어서 눈이 마주친 순간 처음 보는 고양이인줄 알았다. 그놈도 나도 홀로 독대하듯 만난 건 처음이어서 일까. 우린 잠시 멈춰 서서 서로를 염탐하듯 째려봤다. 까미는 특유의 경계 눈빛을 거둔 채 나를 ‘저 인간은 또 뭐하는 인간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니까 나는 뭐하는 인간일까 혹시 알면 좀 알려줄래? 나는 나도 모르게 까미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고, 웬일인지 까미도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예전처럼 질색하지 않았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신경을 곤두세우며 소란을 떨지도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무심하게 까미를 그리고 나를 봤다. 그저 일상의 흔한 풍경처럼. 까미도 묘한 눈빛으로 관찰하듯 나를 봤다. 더는 고슴도치처럼 날이 선 시커먼 자신의 몸을 무서워하지 않는 나를. 푸른 횃불 같은 자신의 눈을 태연하게 관람하는 나를.      


그때 처음으로 까미의 눈을 제대로 보았다. 그래서 그제야 알았다. 까미의 눈은 내가 파리의 거리에서 만났던 코코와 닮았다는 걸. 순간 가슴에서 뭔가가 찌르고 지나갔다. 길고양이의 눈빛. 버려진 존재의 눈빛이 저토록 강렬하고 단단하다니. 세상 그 무엇이 와도 한방에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나는 매혹되었다.      


까미를 만난 후, 거짓말처럼 수많은 길고양이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백구를 만나면 주려고 갖다 다니던 코코의 사료와 물통을 내밀었고 이전엔 나만 보면 내빼던 그들도 순하게 다가와 물과 사료를 먹었다. 그들의 눈은 고요하고 깊었다. 불안한 건 깃털처럼 흔들리는 건 나였다. 나는 그들에게 사과했다. 내가 니들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내 멋대로 니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다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건 나였다고.      

코코처럼 간식투정 안하고 잘 먹는 그들을 뿌듯하게 보는 나를, 까미가 할 말 있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넌 왜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해?’

‘응? 그 그러게...’

‘니가 버려졌다고 생각해서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거냐? 

‘응? 그 그런가...‘

‘넌 니가 왜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그러게 나는 왜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 왜 내가 나로는 부족하다고 사랑받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까미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걷는 날들이 쌓였다. 그러자 이번엔 기억들이 불쑥불쑥 내 몸 밖으로 떨어졌다. 밤톨처럼. 낙엽처럼.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아기의 몸으로 울고 울었던 기억,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와 주지 않던 기억, 혼자 깊어지는 밤하늘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던 유년의 기억, 그것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그게 오해라고? 헐! 난 아직도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확신하고 있었다. 왜 따위 필요 없었다.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놓고 나를 난감하게 쳐다봤던 그 눈빛들을. 그 무심한 마음결들을.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난 이제 기운이 없는데, 기억은 상처는 지 혼자 변함없이 너무 씩씩했다. 이제 그 상처를 읊어대며 공격할 그녀도 그들도 없었다. 그제야 분명해졌다. 소란에 머무르고 싶어 한 건 ‘너’가 아니라 ‘나’였다. 


‘그냥 버려. 봐봐 이렇게.’ 코코는 그렇게 말하며 오줌을 시원하게 쌌을 것이다. 하지만 코코 대신 까미가 있었다. 까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코코의 눈빛은 신비로웠다. 코코가 넓고 깊은 바다 같다면 까미는 뜨거운 태양빛 같았다.      


까미처럼 말이 없어진 내가 까미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공터에 앉아서 해지는 하늘을 각자 바라다 보고 있었다. 붉게 물드는 저녁 하늘은 자신의 피로 여름을 살해하는 신의 얼굴 같았다.  까치인지 참새인지 새들이 후드득 날았고 소리들이 다시 들려왔다. ‘괜찮아. 뭐든 괜찮아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나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까미와 눈이 마주쳤다. 까미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따라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코가 일어났다. 다 나았다. 나는 안도했다. 허공에 붕붕 떠 있는 것 같던 발이 비로소 땅에 안착하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희망도 생겼다. 코코도 이겨냈는데 나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코코와 산책을 나갔다. 까미는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들도 전보다 덜 나타났다. 나타나도 멀찍이서 나를 힐긋 보고는 달아났다. 코코 때문인가? 좀 섭섭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한편으론 안심도 됐다. 코코가 다시 열심히 냄새를 맡았고 개들을 보며 짖었다. 일상이 복귀되었고 문제가 수습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찾아들었다.        


코코와 산책길을 배회하다가 코코와 개들이 맹렬히 짖어대는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말했다. ‘사실 거짓말이었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말. 거짓말이었다고.’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그 소리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무서운 꿈을 꿨다. 내가 까미를 죽이는 꿈을. 잠이 깬 후 코코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까미를 어떻게 죽이는 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죽이고 난 후 두렵고 끔찍한 느낌은 생생히 기억나서 나는 하루 종일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그 며칠 후, 우리 아파트 캣맘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까미가 죽었다고. 살해당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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