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타는 것은 위험하다. 걸어다니는 것은 더욱더 위험하다. 적어도 이곳 알바니에서는 말이다. 보통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운전면허증이 불미스러운 일로 중지됐거나, 면허증 발급이 어찌됐든 이유로 어려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 처럼 오랫동안 운전면허증을 딸 생각을 아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이유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이는 물론 나의 짐작일뿐 어떤 통계나 증거를 기반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미국인 친구 베벌리는 26살에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한다. 베벌리 언니는 16살때부터 운전을 하고 다녔고 보통 미국인에 비하면 베벌리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제야 면허증을 딴다고 그리고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 두렵다고 하는 나의 불안감을 베벌리는 충분히 이해해줬다. 일반 미국인들에게 나는 범법자로 여겨질 뿐이다.
면허증을 발급받기 전까지는 대중교통 버스가 나의 발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학생증이 무료 버스카드 기능을 하고 있어서 버스는 완전 무료다. 탈때마다 1.5불을 내야 하는데 학생증카드만 긁으면 무료 승차가 가능하니 그나마 버스를 이용하는 맛이 난다. 운전을 하고 다녔으면 이런 맛을 못 느꼈을 테다.
항상 같은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첫 날부터 오랫동안 못 만나본 친구를 만나듯 나에게 인사를 건넨 이들이다.
그녀이야기.
"어디가요?" "여기 살아요?" "룸메 있어요?" "난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화장실은 몇개에요?" "우리 집엔 화장실이 2개에요" "부모님 보고싶어요?"
순식간에 받은 이 질문공세에 난 혼이 나갔다. 그래서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난 별로 궁금하게 없기 때문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날은 그녀의 다정다감함에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땅딸막한 아시아계 여자아이 같은 나를 발견해주고 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그녀는 친구가 많이 없는 나에게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차례로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버스에 올라서자 마자 무 자르듯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고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버스안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많았다. 버스 앞문 근처 자리에 올라탄 그녀는 버스 뒷문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와 큰 소리로 서로 안부를 물었다. 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핑크색 머리 여자도 그녀의 친구였다.
"애들은 잘 지내요?" "어제는 일했어요?" "오늘 옷 참 예쁘네요."
그녀는 핑크색 머리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 전에 미리 버스 줄을 당겨주기도 했다. 버스 맨 끝자리에 앉아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도 그녀의 친구였다. 남자는 그녀의 다양하고 끈질긴 질문에 오로지 예 아니오로만 답해줄 뿐이었다.
알고보니 이 시간에 이 버스를 탄 모든 승객이 그녀와 대화를 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녀를 만났다. 오늘은 그녀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녀는 내 근처로 와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룸메랑 같이 산다고 했나요?" "룸메가 많이 도와줘요?" "룸메는 운전해요?" "부모님 보고 싶어요?" "지금 어디가요?" "우리 집엔 화장실 2개 있는데 집에 화장실 몇개있어요?"
질문이 지난번과 똑같았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의 유산으로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사람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한다. 짜증이 확 몰려왔다. 비도 오고 습도도 높고 더운 날인데 그녀는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계속 퍼부으면서 날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다행히 버스가 시간표보다 더 일찍왔다.
버스안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이미 똑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에게 묻는 그녀의 질문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토시하나 틀리지 않는 이 똑같은 시나리오가 지난 몇 년간 지속되어 온 것일까?...
그남자 이야기.
그 남자를 처음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날 그는 날 깜짝 놀래켰다. 너무 멀쩡하고 건장하게 생긴 남자라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꺼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질문을 건넨다.
"여기 살아요?" "학생이에요?" "내 딸은 보스턴에서 의학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의과대학이란 말에 난 물었다. "학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딸이 장학금을 받고 다녀요." "난 알콜중독자에요. 멍청해요. 하지만 내 딸은 엄청 똑똑하죠."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한국은 참 좋은 나라라고 한다. 좋은 차도 만들고 좋은 가전제품들도 많이 만드니까. 버스가 와서 우리의 대화는 중지 됐다. 이미 한번 경험해 본 터라 일단 버스에 올라타면 이 사람과 나는 대화하지 않을 것이란걸 알기에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 남자가 야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릴때 그 남자에게 '잘가요'라는 인사도 해주고 작별인사도 받아보고 싶었지만, 우린 끝까지 남남으로 헤어졌다.
그들은 인간의 따스함이 그리웠나보다. 대화를 통해 서로 말을 섞으면서 전해지는 인간의 온도 말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지 몰라 그들의 머리속에는 이미 저장된 똑같은 질문으로만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건장한 알콜중독자도 다시 만나면 나에게 똑같은 말과 질문을 틀림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되풀이 되는 말과 질문을 죽도록 싫어하는 나지만, 그들의 말을 무시할수는 없었다. 그들의 대화에 응하지 않는건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거니까...
다음번에는 새로운 질문을 내가 먼저 던져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