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엄마와 중년 아들의 사랑과 요리 이야기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비는 나에게 위로였고, 친구였다.
후드득 숲을 깨우는 빗소리, 창문을 노크하며 미끄럼을 타는 빗물,
그리고 대지에 젖은 비 냄새 얼마나 정겹던가.
비 오는 여름날 이면 우산을 벗어던지고, 밭두렁을 맨발로 걸었던 어릴 적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비 오는 날에는 모든 게 용서가 되었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 한잔은 절로 ‘캬’ 엔도르핀 자동소환.
하지만, 요즘은 비 노이로제에 걸렸다.
시골어머니 집과 우리 집은 불과 30분 거리다.
어머니집에서 자지 않고 시내집에서 출근하는 날이면, 항상 똑같은 일상의 시작.
눈 뜨자마자 휴대폰으로 CCTV를 확인한다. 혼자 사시는 엄마를 위해 거실과 마당에 CCTV를 설치했다.
밤새 잘 주무셨는지? 아침에 무슨 일을 하시는지?
변함없는 루틴이 이루어진다. 6시경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신다.
그리곤 양치를 하시고 나면 옷을 갈아입고 일찍부터 등원 준비를 하신다.
가끔씩 거울도 보신다. 마당에 새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평온한 아침이 시작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평온했던 일상은 급변한다.
주간날씨를 늘 확인하지만 예기치 않게 8시경에 비가 오면 낭패다.
온몸이 긴장감으로 경직되고, 심장박동은 빨라져 초 긴장 상태가 되고 만다.
8시경에 주간보호센터(이하 주보) 선생님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고, 이어지는 엄마와의 실랑이,
그리고 어김없이 나에게 울리는 휴대폰 벨.
“주보 ㅇㅇ선생님입니다. 어머님께서 등원을 안 하신다고 완강하게 거부하세요”
“비만 오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8시는 주보선생님이 오시는 시간이다.
비만 오면 주보 등원을 거부하시는 엄마.
등원 선생님께서 어르고 달래다가 더 이상 어렵다 판단되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와 나는
스피커 폰으로 연결된다.
“엄마 내가 조금 있다 집에 가서 일할 테니 그냥 오늘은 등원하세요.”어쩔 때는 나의 말 몇 마디에 등원을 하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금요일에는 아주 완강하셨다. 스피커폰을 타고 들리는 음성은 평소 하고는 다른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엄마의 목소리만 들어도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오늘은 등원이 어렵다는 판단이 선다.
“비가 오니까 윗집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옥상에 떨어져 배수로를 막아 버린다”는 걱정.
그리고 “대문 앞 감, 포도나무 잎이 마당에 떨어져 지저분하게 만든다”는 이유.
“집에서 할 일이 많다.”는 핑계.
“쌀도 있고 반찬도 냉장고에 가득 차서 먹을 게 많다.”는 여유.
“너희들 귀찮게 하지 마라 유치원(주보) 안 간다.”는 저항.
비가 남들에게는 사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엄마에게는 재앙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저번 주 비 오는 날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엄마의 걱정거리인 나무를 제거하였고, 부축을 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시켜드렸다.
"엄마 봐요 이제 나무 베었으니 비가 와도 유치원가요"라는 말에 알았다고 하셨지만, 비만 오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실랑이.
엄마는 왜 비를 두려워하시는 것일까?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몇 년 전 장마철에 많은 비가 내리던 날, 하수구가 막혔다고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구체적인 말씀은 못하시지만, 그때의 기억으로 불안과 공포는 마음 깊숙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치매라는 병은 인지적 기능은 앗아가도, 정서적 기억은 여전히 남겨 두었다.
뇌 과학적으로 볼 때, 치매와 트라우마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서술적 기억(Declarative memory)과 절차적 기억(Proceddural memory)이다. 서술적 기억은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다.처럼 의식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을 말한다. 절차적 기억은 자전거를 타고 젓가락 질을 하는 것처럼 몸으로 익힌 기술이나 습관을 말한다.
하지만, 치매가 진행되면서 해마(Hippocampus)가 손상되면, 새로운 서술적 기억을 생성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어제 주보에 등원을 하셨는지, 무얼 드셨는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편도체(Amygdale)에 저장된 감정적 기억과 공포반응은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된다.
특히, 트라우마적 경험은 편도체에 깊이 각인되어 치매가 진행되어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트라우마적 사건이 발생하면 뇌는 자동으로 생존모드로 전환된다.
이때 스트레스호르몬인 코르티졸이 다량 분비되어, 편도체는 과 활성화 되고 해마의 기능은 억제된다.
결과적으로 트라우마의 기억은.
비논리적이고 조각처럼 저장된다.
감각정보(소리, 냄새, 촉감 등)와 강하게 결합된다.
조건화된 공포반응을 일으킨다.
인지적 처리과정 없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된다.
그래서 평소에 억눌려 있던 트라우마 기억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튀어 오르는 것이다.
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기억도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재통합과정을 거칠 수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 비 오는 날 등원에 대해서는 엄마의 의지에 맡겨야겠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 속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드려야겠다.
끝물이지만, 엄마가 좋아하시는 옥수수를 사다 쪄 드렸다.
해맑은 웃음 속에서 하얀 틀니가 옥수수와 섞여 키재기를 한다.
트라우마는 기억을 앗아가지만, 사랑은 기억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