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엄마와 중년 아들의 사랑과 요리 이야기
무더위가 좀처럼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려주면 좋으련만,
이번 주는 엄마를 위해 특별한 별미를 준비해 보기로 했다.
콩을 불리고 삶아 직접 콩물을 내는 것은
아직 요리에 서툰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재래시장에서 갓 만든 콩물을 사 오고,
나머지 재료들은 텃밭에서 마련하기로 했다.
텃밭 풀숲에 숨어 있던 노각을 찾아 채를 썰고,
색감을 더하기 위해 달큼한 빨간 고추와 풋고추를 곁들였다.
넉넉히 삶은 국수 위에 노각과 고명을 얹고
참깨를 듬뿍 넣고, 시원한 콩물을 부으니,
보기만 해도 더위가 한풀 가시는 듯했다.
엄마는 국수를 즐겨 드시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리 아들이 맛나게 국수를 삶아서 최고로 맛있다.”
입가에 콩물이 묻은 채 웃으시며,
하얀 속살의 노각을 보시고는 “근데 이건 참외구나” 하신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사소한 것조차 다른 것으로 착각하신다.
그래도 ‘맛있다’는 말씀 한마디에 마음이 놓인다.
7월이면 우리 마을은 바람결에 보리밭이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던 시기,
집집마다 보리 수확이 한창이었다.
뻐꾸기 울음은 농사철을 알려주는 살아 있는 달력이었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광주리마다 하얀 국수가 주먹 만한 눈덩이처럼 가득 담겼다.
새참으로 내오던 국수는.
맹물에 설탕을 듬뿍 타 넣어야 제맛이 나는 단출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최고의 별미였다.
그 시절 우리 형제들은 배가 불룩해지도록
국수를 먹었고, 행복감은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나는 엄마한테 애교 담긴 투정을 부렸다.
“엄마, 우리 어릴 때 새참 국수 생각나지?
나 설탕 국수 먹고 싶어 만들어줘” 라며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엄마는 힐끗 나를 바라보시더니,
대답 없이 콩국수만 드신다.
이제는 그 기억조차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치매와 노화, 그리고 ‘맛의 상실’.
치매는 기억만 잃어가는 병이 아니다.
뇌 속의 신경회로가 서서히 손상되면서,
후각, 미각, 식습관까지 달라진다.
뇌의 ‘후각 피질’과 ‘미각 피질’이 손상되면
음식 고유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음식의 맛 기억은 단순히 미각만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후각(노각 냄새, 콩국수의 고소함), 미각(단맛), 시각(국수 모양),
청각(먹는 소리), 정서적 경험(가족과 함께 먹었던 행복감) 등이 함께 얽혀 저장된다.
치매가 진행되다 보면 이 연합 기억의 네트워크가 끊기면서,
맛은 기억해도 상황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대로 상황은 기억해도 맛을 떠올리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엄마는 그 옛날 추억 뭍은 설탕국수 해달라는 이야길 듣고서도 물끄러미
쳐다보셨던 것이다.
오늘의 노각 콩국수처럼,
엄마와 나 사이의 기억을 되살려줄
작은 희망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야겠다.
엄마는 더 이상 음식의 참맛을 느끼지 못하시지만,
내가 만든 요리를 드시며 미소 짓는 그 순간,
나는 여전히 엄마와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 웃음 하나가 나를 다시 부엌으로 이끌고,
다음 한 끼를 또 준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