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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Oct 28. 2022

10월 28일 탄생화 무궁화 / 무궁화 전설과 꽃말  

오늘의 탄생화 

10월 28일 탄생화는 무궁화입니다. 


무궁화

청초하면서도 깨끗한 느낌이 드는 꽃입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무궁화를 보고 있으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시절 일본을 찬양하고 미화하던 어떤 선생님이 무궁화가 진딧물이 많아 지저분하고 더러운 꽃이라며 멸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선생님은 툭하면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였지요. 우리나라를 한국 사람이라고 지칭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선 놈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니까, "


"조선 놈들이 한 일이 그렇지 뭐."


대충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렇게 나 자신이 초라해졌던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가 1960년여 후반이었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까지도 그런 친일 사상을 가진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선생님 탓이었을까요?

우리 반 아이들은 무궁화를 꺼렸습니다.


선생님이 일본 국화인 벚꽃(사꾸라라고 지칭하면서)을 미화하면서 '꽃이 불같이 한순간에 피어 불처럼 정열적이고, 예쁘지, 거기에다 버찌라는 열매까지도 먹을 수 고 있으니 얼마나 좋냐.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그 나라의 국화인 사꾸라를 닮아 지금 전 세계를 제패하고 있지 않냐, 그런데 우리 꼬라지를 봐라. 무궁화가 뭐야? 하나가 피었다가 이제 지나 싶으면 다음 날 눈치를 보며 죽지 못해 피는 것처럼 또 한 송이가 피어난다. 그렇게 핀 꽃은 진딧물이 더덕더덕하여 지저분하다 못해 추접스러기까지 하니. 어떤 미친놈이 그런 무궁화를 국화로 정했는지 참말로 한심하다."


선생님의 그 말은 어린 내 가슴에 화인처럼 깊이깊이 새겨졌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 교정에도 무궁화가 몇 그루 있었지만, 선생님의 말에 세뇌가 되었기 때문인지 무궁화를 보면 왠지 불결하게 느껴져 다가가기를 꺼렸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활짝 핀 무궁화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놀라며 고개를 돌리고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말을 증명하듯 운동장 구석 방치된 무궁화 꽃과 줄기에는 진딧물이 바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어 벚꽃이 필 때면 선생님의 그 말이 생각났고 창경원 벚꽃놀이 기사를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십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파고다 공원에서 무궁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품종의 개량종 무궁화가 피어있었는데 우리나라 꽃 무궁화가 그렇게 아름답고 고귀하며 품위가 있는 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진딧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지요.

지금까지 제가 제 주위에서 만난 무궁화만 하여도 크기는 물론 빛과 모양까지도 너무나 많은 종류가 있었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그토록 거센 장마에도 전혀 굽힘이 없이 날씨가 아무리 가물고 더워도 아랑곳없이 끊임없이 피고 집니다.


종류도 너무나 다양하고 어여쁜 장미가 지는 것이 아름답지 않지만, 살포시 꽃잎을 말아 감고 뚝 송이째 떨어지는 우리의 무궁화는 지는 모습까지도 너무나 단아하고 정결하기까지 합니다.


계남산에 올랐다가 화장실 옆에 피어있는 순백의 무궁화를 만났습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고결하고 순결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멋진 호랑나비 한 마리!


의젓하게 생긴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호랑나비는 이 꽃 저 꽃을 스치듯 날아다니더군요.

이 뜻밖의 기회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카메라를 눌렀지요.


다행히 몇 장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무궁화를 보면서 이루고 싶은 목록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앞으로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되면 

담으로 꼭 무궁화를 심겠노라고


언제가 될 줄 모르겠지만 초여름부터 가을이 올 때까지 수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는 아마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입니다.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


무궁화는 무궁화과의 낙엽관목으로, 높이 2∼3m. 나무그루 전체에 털이 거의 없고 가지가 많이 뻗어 있으며, 회색의 나무껍질은 단단한 섬유질로 되어 있어서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잎은 길이 4∼10㎝이며 어긋나고, 달걀 모양으로 깊게 3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잎 표면에 털은 없고 3개의 큰 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잎의 뒷면 맥 위에는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 있습니다. 잎자루는 약 1.5㎝이며, 7∼9월에 여름내 꽃이 피고 집니다.



꽃의 지름은 대략 6∼10㎝쯤이며 꽃자루가 매우 짧습니다. 꽃은 분홍색이 대부분이고 꽃잎 안쪽 부위에서는 짙은 붉은색 무늬가 있습니다.

꽃받침은 바소꼴이고 작은 털이 있습니다.

수술은 많으며 수술대는 합쳐져 통 모양입니다. 암술은 1개이며 암술대는 수술대를 뚫고 위로 나옵니다.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익으면 5갈래로 갈라집니다. 씨는 콩팥처럼 생겼으며 자흑색으로 등에 긴 털이 있습니다. 무궁화는 나팔꽃처럼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에는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집니다.

보통 작은 나무는 하루에 20여 송이, 큰 나무는 50여 송이의 꽃이 피므로, 꽃 피는 기간이 100여 일임을 감안하면, 한 해에 2000∼5000여 송이의 꽃이 피며 또한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피는 무궁화 특유의 개화 습성입니다.


겨울이나 이른 봄에도 온도 30℃ 안팎으로 16시간 정도 빛을 쬐면 2주일 후부터는 꽃봉오리가 생겨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합니다.


무궁화의 품종


무궁화는 약 200여 종의 재배품종이 있는데, 배달· 화랑 ·아사달 ·새아침 등 최근에 화려한 품종들이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무궁화는 다른 꽃나무에 비해 병이 거의 없는 편이나 생육 초기에 진딧물이 많이 끼기 때문에 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궁화의 진딧물은 목화진딧물로서 전년도 9∼10월에 무궁화 가지 끝에 산란한 것이 그 이듬해 봄에 부화하여 처녀생식을 계속하여 번식하다가 5월 중순이면 채소·과수 또는 목화 등 다른 곳으로 이동하므로 6∼8월에는 진딧물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궁화의 진딧물은 5월에 가장 심한데,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므로 5월 또는 10월에 한두 차례 구제하면 진딧물 걱정은 없다고 합니다.

무궁화의 명칭과 유래


무궁화의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innaeus이라고 합니다. '히비스커스'는 이집트의 Hibis 신을 닮았다는 뜻으로 곧 Hibis 신처럼 아름답다는 뜻인데, 이것은 속명으로 한 것이고, 명명자 린네가 자생지라고 믿었던 중동의 시리아를 종명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무궁화의 영명은 Shrub Althea 또는 '샤론에 피는 장미'라는 뜻의 Rose of Sharon이며 1596년에 유럽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무궁화는 소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인도·중국·한국(평남·강원 이남) 등에 널리 분포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목근(木槿)·순영(舜英)·순화(舜華)·훈화초(薰華草)·조개 모락화(朝開暮落花) 등으로 불렀습니다. 일본에서는 무궁화를 무쿠게 [牟久計(모구계)]>로 부르고 있는데, 무궁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불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궁화의 번식


주로 꺾꽂이와 접붙이기 등의 영양번식에 의합니다. 꺾꽂이는 봄과 장마철은 물론 한여름에도 모판의 해 가림과 보습(保濕)에 유의하면 70% 이상 활착 시킬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는 시기는 봄이 가장 좋고 장마철도 가능하나 가을에 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습기가 많은 땅을 좋아하고 비료는 거의 주지 않지만, 봄철에 주는 퇴비는 생육을 왕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무궁화의 약효와 효능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흰 꽃은 민간에서 그늘에 말려서 찹쌀과 함께 달여서 지사제(止瀉劑)로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열매는 조천자(朝天子)라 하여 한방에서 이뇨·해열·지혈·지사(止瀉)·위장염 등에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여 약으로 쓰며, 차(茶)로도 만들어 먹습니다. 특히 무궁화 차에는 말산·타르타르산·시트르산 등이 함유되어 있어 상쾌한 신맛이 있으며, 두통·해열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장구(長久) 하게 피고 지는 무궁화는 조경 가치가 매우 높아 무궁화로 수벽(樹壁)을 쳐 울타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식용·관상용·공업용·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국화(國花)로써 무궁화의 내력


한반도에 무궁화가 자란다는 기록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해경 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훈화 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으며, 『구당서 舊唐書』 199권 신라전(新羅傳) 737년(성덕왕 36) 기사에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신라 시대에 이미 우리나라를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화목(花木)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에 “우리나라에는 단군(檀君)이 개국할 때 무궁화[木槿花]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무궁화의 나라(槿域)’라 말하였으니,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봄을 장식하였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라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왜기 倭記』의 기록에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무려 2,100여 년 전 지나(支那)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고, 고려 시대에는 국민과 문학적·의학적으로 사랑과 귀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왕조의 왕실 꽃인 배꽃[梨花]에 밀려 무궁화는 점차 조선 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다.’라고 했다.


1935년 10월 21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조선에도 개화 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尹致昊)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 애국가의 뒤풀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말은 우리 한민족의 가슴속에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뜻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무궁화(無窮花))]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는, 국기(國旗)나 국가(國歌) 같이 확실한 법 규정이나 역사성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궁화는 3000여 년 전부터 민족 정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인용되었고, 더욱이 1948년 정식 채택된 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국화로서의 의미를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입법·사법·행정 삼부(三府)의 표상으로 무궁화가 사용되고, 국기의 봉도 무궁화 봉오리로 제정되어 무궁화는 명실상부한 나라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무궁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분홍색 꽃입니다.

무궁화의 꽃말은 '죽음을 불사한 절개'라고 합니다.


무궁화의 전설


고려 16대 예종 왕 때의 일입니다.


예종 임금에게는 몹시 사랑하는 신하가 셋 있었습니다. 세 사람을 똑같이 아끼어 벼슬도 똑같이 참판 벼슬을 내렸지요. 그러나 임금님의 뜻과 달리 신하들은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종 임금에게 더 잘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더 잘 보이려고 하니, 서로 시기하고 헐뜯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구 참판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비단결 같은 구 참판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면, "쓸데없는 소리 마오. 그 친구를 욕하면 내 얼굴에 침 뱉기요." 하고,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 참판과 박 참판은 둘이 만나면 구 참판 이야기로 하루 해를 보내다, 두 사람은 구 참판을 궁궐에서 쫓아내기로 하고 모함을 하여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예종 임금은 그것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정 참판과 박 참판의 꾐에 넘어간 것입니다.


왕은 못내 애석해하면서 종 하나를 딸려 구 참판을 경상도 땅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왕은 그 모든 것이 박 참판과 정 참판의 흉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귀양지에 도착한 구 참판은 개성 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로지 임금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역적이 된 구 참판의 집안은 몰락하여, 구 참판의 부인은 종이 되어 끌려갔고, 아들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구 참판은 임금님을 원망하기는커녕 임금님에 대한 충성심은 날로 더해만 갔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구 참판의 임금을 향한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시종이 음식을 먹기를 간청했지만, 구 참판은 그것마저 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보슬비가 내리던 날 밤 구 참판은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시종은 슬피 울며 구 참판을 양지바른 곳에 묻었습니다.


다음 해 봄. 구 참판의 묘 앞에는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이 꽃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화, 무궁화입니다. 임금님을 사랑한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 무궁화 꽃 속은 빨간빛이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꽃잎은 하얀빛과 보랏빛 등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너무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꽃, 바로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랍니다.


또 다른 무궁화에 대한 전설은 옛날 북부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는 데에다 생긴 것마저 어여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랑스럽고 어여쁜 여자의 재주를 칭송하며 그를 아꼈겠지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여자의 남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쁜 여자는 마음씨까지 고와 자신의 남편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여자를 유혹하였지만, 이 여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을 다스리던 성주가 그녀의 재주와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애가 탄 성주는 마침내 부하를 보내 강제로 그녀를 잡아들였습니다. 그녀를 성에 데려온 성주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남편만을 사랑했던 그녀는 끝까지 성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주는 너무나 화가 나 그녀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뒤 성주는 그녀의 절개에 감탄하며 그녀의 시체를 남편이 사는 집안 뜰 앞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나무는 자라고 자라서 집을 온통 둘러쌌습니다. 마치 장님인 남편을 감싸주고 보호해 주려는 듯 말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일컬어 울타리 꽃이라 불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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