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탄생화
목화에 대해 글을 쓰려고 저장해 둔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다.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자료를 모아둔 지가 그렇게 된 것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 자꾸만 뒤로 처진 것이다.
목화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우리 아파트 안에 있는 유치원에서 본 목화 꽃의 예쁜 모습에 반해서였다.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아주 어렸을 때 도회지로 이사를 한 나는 목화에 대해 무지했다.
내가 시골에서 보낸 것은 고작 7~8년에 불과하고 내 기억력은 그리 신통치 않아 시골에서 기억하는 일은 1~2년 남짓하기 때문이다.
목화에 대한 기억은 특히 가물거려서 그 작은 조각을 찾는다는 일은 너무 버겁다. 하지만 덜 익은 목화 열매를 따 달착지근한 열매를 씹어 단물을 빨아먹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덜 익은 목화 열매가 다래와 맛이 비슷하다고 하여 목화 다래라고도 불렀다.
해마다 목화 농사를 지었던 이유는 이불솜 때문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깨끗이 빨아 삶고 풀을 먹어 다듬잇돌 위에서 곱게 윤을 낸 이불 홑청은, 솜틀집에서 새로 틀어온 이불솜을 넣은 안감 위에 놓고 안경을 큰 바늘로 꿰매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솜이불은 솜이 뭉쳐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솜틀집에서 새로 타 고르게 펴줘야 했다. 그렇게 새 이불로 거듭난 이불은 가볍고 따뜻했었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에서 엄마는 늘 단내가 난다고 했었다.
나는 단내 나는 이불보다 새로 솜을 틀어 풀 먹인 새 홑청으로 만든 이불이 너무 좋았다. 그 푹신하고 아늑한 느낌~ 오성급 호텔 이불이 부럽지 않던 그 솜이불.
지금은 솜이불을 찾기 힘들다.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두꺼운 이불이 필요 없어진 까닭이다.
그래도 우리 집 장롱에는 작은 올케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온 엄마의 솜이불 한 채가 있다. 흰 홑청과 노란 공단으로 한껏 치장을 한 엄마의 솜이불! 얼마 덮지 않아 새 이불 그대로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두 언니는 그 이불을 함께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어머니의 체취가 남은 그 이불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난 뒤 나는 목화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이십여 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근처 유치원에서 목화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며 참 많은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꽃봉오리부터 꽃이 펴서 질 때까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변해가는 매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생하게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목화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미루게 되었다.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귀국할 때 몰래 씨앗을 붓두껍 속에 숨겨와 경북 산청 처가에서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는 목화!
이제 그 목화에 대한 빚을 갚을 때가 온 것 같다.
12월 12일 탄생화가 목화이니 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화에게 조금 미안하다. 탄생화와 무관하게 온전히 목화만을 위한 글쓰기가 되었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목화도 내 이런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목화는 쌍떡잎식물 아욱 목 아욱과 한해살이풀의 총칭이다.
면화·미영·미면 등으로도 불리는 목화의 학명은 Gossypium indicum LAM.이다. 온대지방에서는 한해살이풀이지만 원산지인 열대지방에서는 목본식물이다. 높이도 우리나라에서는 90㎝ 내외에 불과하지만 열대지방에서는 180∼210㎝까지 자라기도 한다. 원줄기는 곧게 뻗으며 15개 내외의 마디가 있고 각 마디에는 잎과 두 개의 곁눈이 있다.
꽃은 7월 하순에서 8월 하순에 걸쳐 개화하며, 꽃봉오리가 맺히고 난 뒤 꽃이 피기까지는 약 30일이 소요된다.
꽃에는 5매의 꽃잎과 3매의 꽃받침, 1개의 암술 및 약 130개의 수술이 있다. 수정은 대부분 자가수정을 한다.
수정 후 내부의 종자가 커짐에 따라 자방이 발육하여 과실이 되는데 이것을 다래라고 한다.
다래는 녹색 또는 진한 녹색을 띠며 모양은 둥글거나 달걀 모양을 나타내고 표면에는 홈 모양으로 된 무늬가 있다. 개화 후 다래가 성숙하여 면모를 노출시키는 개서까지의 소요일 수는 재래면은 30일 내외이고 육지면은 43일 내외이다.
목화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남부, 인도·인도네시아, 안데스 산맥 북부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도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 페루에서는 기원전 2500년,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500년경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목화 재배는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文益漸)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 붓 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문익점 면화 시배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다. 정천익은 3년의 시험 끝에 재배에 성공하였다. 문익점의 손자 래(萊)는 제사법(製絲法)을 발명하였으며 손자 영(英)은 면포 짜는 법을 고안하였는데 그 뒤 100년도 되지 않아서 널리 보급되었다. 문익점이 도입한 목화는 아시아면이었는데, 1905년에 일본 영사 다카마쓰(高松)가 육지면을 도입하여 전라남도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경기도 이북에서는 주로 아시아면이, 경기도 이남에서는 육지면이 재배되었다. 목화는 강원도, 함경남도 일부 및 함경북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서 재배되었는데, 특히 전라남도·경상북도·평안남도·황해도가 주산지였다. 오늘날 연간 세계 목화 총생산량은 약 1,500만 톤으로서 최대 생산국은 소련·미국·중국·인도 등의 순이다.
목화는 다래가 벌어진 것부터 차례로 수확한다. 9월 상순부터 시작하여 된서리가 오기 전까지 대부분 수확되는 것이 적채면(摘採綿)으로 질이 좋은 상품이고, 된서리가 온 뒤에 식물체가 죽고 난 뒤 건조하여 다래가 벌어지게 한 다음 따는 것은 목채면(木採綿)이라 하는데 품질이 떨어진다. 수확한 목화는 씨아 또는 조면기로 씨앗과 섬유를 분리하여 원면(原綿) 또는 솜을 얻는다.
목화는 우리 조상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목화로 무명옷을 만들어 입고, 겨울에는 솜을 옷에 넣어 솜옷을 만들어 입고, 솜이불을 만들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목화의 섬유는 주로 면사·면직물·혼방용·그물 등의 방직용과 이불솜·옷 솜·탈지면 등의 제면용 또는 면화약·셀룰로이드 등의 공업용으로 쓰이며, 열매[種實]는 기름을 짜 식용유·버터·마가린 등의 제조에 쓰인다. 깻묵은 사료나 비료로 이용하고 목화 대는 제지용 펄프 원료와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목화 [木花]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옛날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중국 어느 마을에 '모노화'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널리 소문이 나 많은 남자들이 앞다투어 청혼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돈이 많거나 권력 있는 남자들을 거부했던 모노화는 어느 날 가진 것이 전혀 없는 한 상인과 결혼을 하였다. 상인이 그녀에게 건넨 것은 한 송이 꽃이었다.
그렇게 결혼한 모노화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게 살았고, 두 사람 사이에 예쁜 딸이 태어났다. 딸의 이름은 '소조챠'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평화롭던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 나간 모노화의 남편은 그만 전사를 하였고 모노화의 나라는 전쟁에서 패해 망하고 말았다.
나라를 잃어 먹을 것은 물론 거처할 곳도 없는 그녀는 배를 곯아 숨져가는 딸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모노화는 '소조챠'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딸에게 먹였다.
그러나 모노화는 생살을 떼어낸 허벅지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나흘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졸지에 고아가 된 소조챠!
마을 사람들은 모노화의 장례를 치렀고 소조챠는 부잣집에 맡기기로 하였다.
모노화가 죽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무덤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소조챠는 엄마의 무덤에서 나온 싹을 잘 기르려고 했지만 심한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여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소조챠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 엄마의 무덤에서 난 식물은 물을 주지 않았어도 잘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어느 날 열매가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눈처럼 흰 '솜'이 나왔다.
사람들은 모노화가 죽어서도 차마 딸을 잊지 못해 부드럽고 따뜻한 솜을 보내 준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이 식물의 이름을 '모노화'라고 불렀다. 그러다 '모화'라고 부르다가 시간이 지나 '목화'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