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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Dec 23. 2022

붕어빵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삶의 단상 

오늘은 국화빵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붕어빵이 나오기 이전 국화빵이라 불리던 풀빵이 있었다. 국화 모양의 문양의 틀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국화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내게는 풀빵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내 기억의 최초는 대 여섯 살 그 언저리이다. 태어나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나는 무척 순했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너는 젖만 먹여놓으면 그냥 잤어. 밤이나 낮이나 배만 안 고프면 절대 칭얼대는 법도 없었어"


이 말을 하실 때의 아버지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했고 나는 참 사랑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왜 국화빵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궁금할 필요는 없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풀빵 속에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닐곱의 나는 덕유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안성 장터 초입에 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오빠, 나 세 명의 남동생 우리 8 식구는 방이라고는 두 개뿐이었지만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았다. 


집이 장터 초입에 있는 관계로 장날이면 우리 집은 늘 북적거렸다. 그건 쌀장사를 하시던 외삼촌이 우리 마당에서 임시 장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큰 멍석이 펼쳐졌고, 외삼촌은 내 몸통만 한 말로 머리에 이고 왔거나 지게에 지고 온 쌀자루를 받아 말똥이 넘치도록 부었다. 외삼촌이 살 때는 가급적 봉긋하게, 팔 때는 이와 반대로 최대한 말 통과 일직선이 되도록 되어 아래 왼쪽 사진의 둥근 막대로 싹 밀어 사람들과 약간의 언쟁도 있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교육부 홈페이지

그런 외삼촌을 엄마는 나무라셨다.


팔 때도 살 때와 같이 말이나 되를 넉넉히 되어주지 왜 그렇게 야박하게 사람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싹 깎아내리냐는 것이다. 그 말에 외삼촌의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말씀하셨다.


"아니 누님은 그럼 날 보고 땅 파서 장사하라는 거요?, 그러니께 누님이 못 산당께요. 그렇게 싹 깎아서 몇 번만 팔면 한 되도 넘게 떨어지는데...."


외삼촌의 자랑스러운 말에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쌀 한 되씩 팔아다 먹는 사람들 심정이 오죽하겠나, 얼마나 없이 살면 쌀을 한 납데기도 아니고 한 됫박씩 팔아먹겠는가?"


일찍이 장사에 눈을 떠 이재에 밝았던 외삼촌에게 엄마의 이 넋두리는 잔소리에 불과했다. 여기서 되와 납데기는 나도 많이 헷갈리는 단위로, 한 납데기는 두 되를 일컫는 단위이고, 다섯 납데기가 한 말이었다. 대개는 큰 되, 작은되로 부르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우리 엄마도 자본시장의 대열에 진입을 한 것이다. 우리 집이 장터 초입에 있었던 관계로 장날에 맞춰 우리 집 앞에서 풀빵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엄마의 풀빵 장사는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성황이었다. 장이 끝나고 엄마가 장사를 마무리하고 난 뒤, 엄마가 앞치마를 벗어 그 속에 든 돈을 쏟아낼 때면 우리는 젖먹이 동생까지 빙 둘러앉아 그 경이롭고 신나는 광경을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와르르 ~ 쨍그랑,


동전과 지폐가 뒤섞어 쏟아지면 우리는 모두 돈을 세기에 바빴는데, 지폐는 아버지와 엄마가 나머지 동전은 우리들 몫이었다. 동전을 단위별로 골라 열 개씩 쌓아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이다.


방안 가득 일렬로 정돈된 지폐와 동전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일은 우리에게도 몇 개씩의 동전이 주어졌고 장날마다 계속되었다. 1960년대 초 돈이란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것이어서 어린아이가 돈을 가진다는 일은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엄마가 만든 풀빵 맛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손에 쥐어진 동전만 생각날 뿐이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 가족은 오빠의 공부를 위해서 국민학교 1학년 겨울 전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던 해 집을 구입하지 않고 난생처음 셋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백 년도 넘은 팽나무가 있고 우물이 있던 남노송동 그 낡은 집, 집도 옹색했지만 우리가 셋방을 산다는 사실에 한껏 위축된 나는 항상 움츠리고 다녔다. 물론 그다음 해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시골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학교에서도 나는 외톨이였다. 옷매무새도 머리 모양도 보자기 책가방도 나를 더욱 초라하게 했다.

학교를 가려면 철도를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우리 집 골목을 나와 철길로 들어서는 초입에 풀빵 가게가 있었다. 반나절 동안 아이들 눈치 보느라 초주검이 된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풀빵 가게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계피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먹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돈이 없었다.


한참 동안 풀빵 굽는 아저씨를 바라보고 연탄불 위에서 쉴 새 없이 구워지는 풀빵을 보고 또 보고 그래도 아쉬워 다시 돌아보며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전주에 이사와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은 내게 엄청난 슬픔을 주었다.


왜 돈이 없을까?

우리 집은 다른 집처럼 살지 못하고 가난한 것일까?


궁금증은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아이 손 시려~"


나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이불이 깔린 아랫목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얼른 이불속 내 손을 꺼내 아버지의 큰 손으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렇게 추웠어?"


"응! 손이 겁나게 시렸어!"


"그랬구나, 우리 딸이."


아버지의 두 눈에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너무나 행복한 나는 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아버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순간,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웃음을 가득 띠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긴 우리가 왜 가난해!"


"가난하잖아."


"아냐, 우리 아주 부자야!"


나는 아버지의 그 말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그럼 돈도 많아?"


"그럼. 아주 많지."


"어디에 있는데?"


아버지가 힘주어 말씀하셨다.


"어디에 있긴, 내가 하늘에다 꽁꽁 묶어놨지."


"정말?"


"그럼 정말이고 말고."


"그럼 그 돈이 언제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네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깨끗이 쓸고 엄마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 어느 날 마당에 뚝 떨어져 있을 거야!"


아버지의 그 말을 믿은 나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마당은 물론 골목 끝까지 쓸고 또 쓸었다. 덕분에 어른들에게 착하고 싹수 있는 아이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곁에 없는 지금

사진 출처 / 조선일보

아버지가 하늘에 꽁꽁 묶어두었다는 돈은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던 아버지에게 왜 가난하냐고 물었던 철없던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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