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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Dec 27. 2022

12월 27일 탄생화 매화 / 선비들이 사랑한 매화

오늘의 탄생화

12월 27일 탄생화 매화


매화는 10월 24일 탄생화였다. 그리고 매화와 매실주에 관한 글도 썼다.


다시 그 내용을 옮기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아 이번 포스팅에는 매화선비 문화에 대한 내용과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경기도 광주시의 낙매화터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매화 (梅花)


매화는 갈잎 중간 키 나무인 매화는 꽃을 강조한 이름이고, 열매를 내세우면 매실 나무라고 부르며, 학명은 Prunus mume이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매화는 다른 나무에 비해 꽃이 일찍 피는 까닭에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화괴(花魁)’라 한다.

매화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각기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일찍 피어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피어서 ‘동매(冬梅)’, 눈 속에 피어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또 꽃의 색에 따라 희면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른다. 우리나라 화가의 경우 대개 18세기까지는 백매를 선호했으나 19세기부터 홍매를 선호했다.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는 매화를 음력 2월에 볼 수 있다. 그래서 매화를 볼 수 있는 음력 2월을 ‘매견월(梅見月)’이라 부른다.

매실의 기록은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매실은 다른 과일에 비해 신맛이 강해 매실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한 경우가 있다. 우리가 난세의 영웅이라고 알고 있는 조조이다.


위나라의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했는데 그만 길을 잃어 군사들이 몹시 지쳤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 한 모금 마실 곳이 없었고 군사들은 갈증으로 행군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을 때였다. 조조는 큰소리로 군졸을 향해 소리쳤다.


“저 산을 넘으면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 여기서 열매를 따 먹자”


이 말을 듣고 군졸들은 매실을 생각하였고, 입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의 이 고사에서 매림지갈(梅林止渴, 매실이 갈증을 그치게 함)이란 사자성어가 탄생했다.


선비들이 매화나무를 좋아한 이유는 추운 날씨에도 굳은 기개로 피는 하얀 꽃과 은은하게 배어 나는 향기, 즉 매향(梅香) 때문이다.

산청 운리 정당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는 정당매(政堂梅)이다. 이 나무는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편찬자인 강희안의 조부인 강회백이 심은 나무이다. 정당매는 강회백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일손은 『정당매기(政堂梅記)』를 남겼다. 지리산 자락의 단속사에 살고 있는 정당매는 600년의 세월을 견딘 탓에 키도 작을 뿐 아니라 죽은 가지도 적지 않다. 정당매 앞에는 매화를 심은 뜻을 기린 비석이 있다.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 호산 이완종 묵매도

풍속화의 대가인 단원 김홍도는 매화를 무척 사랑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려 왔지만, 김홍도는 매화 값이 없어 살 수 없었다. 단원이 애석해하고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김홍도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사례비로 3,000냥을 주었다. 그러자 단원은 2,000냥을 주고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이것을 일컬어 ‘매화음(梅花飮)’이라 한다.


경북 성주 회연서원 백매원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퇴계의 제자인 한강 정구는 고향 성주에 회연서원을 세우고 뜰에 매화를 심고 백매원(百梅圖)을 만들어 놓고 살았다. 지금도 회연서원에는 이른 봄 만발한 매화를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백매원은 중국 남송시대 송백인이 편찬한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에 수록된 매화 그림 백 폭을 일컫는「백매도(百梅圖)」를 본 딴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 송나라의 범성대는 세계 최초로 매화나무에 관한 전문서적인 『매보(梅譜)』를 편찬했다. 중국에서 매화가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대략 북송시대이다. 선비들이 매화를 그린 것은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경북 선산군 구미 매학정

중국 북송시대 임포는 ‘매화 그림’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그는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숨어 살았다고 하며, 그의 작품「산원소매(山園小梅)」에 쓴 시어(詩語)는 후대에 매화 그림의 주요한 화제(畵題)로 사용되었다. 이때부터 달과 매화를 그린 ‘월매도(月梅圖)’와, 물가에 가지가 거꾸로 자라는 도수매(倒垂梅) 등이 유행했다.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구미 매학정(梅鶴亭)도 임포를 모델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의 매화 사랑도 각별하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 백경 중 「가메이도 매화정원」 /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매화나무(히로시게를 따라서)」

일본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 매화 그림 중 에도시대 오카타 고린의 「홍백매도 병풍(紅白梅圖屛風)」과 동시대의 화가인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에도 백경(江戶百景) 중 하나인「가메이도 매화정원(龜戶梅屋敷)」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특히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은 매화 판화를 반 고흐가 유화로 모사해서 더욱 유명세를 치렀다.

매화와 관련된 전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매화 분재에 물을 주거라”라는 유언을 남긴 퇴계 이황은 더욱 유명한데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매실이 익기 시작하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장마가 시작되는 기간이다. 이 때문에 장마를 매우(梅雨) 혹은 매림(梅霖)이라고도 부른다. 잘 익은 매실 열매를 ‘황매(黃梅)’라고도 부르는데, 이 황매는 중국 선종의 5대 조사이자 혜능의 스승인 홍인을 일컫는다. 홍인이 중국 후베이 성의 황매산에서 수도했기 때문이다.


자료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봄을 알리는 매화 (세상을 바꾼 나무, 2011. 6. 30., 강판권)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매화에 대한 시를 지었지만 그중 필자가 좋아하는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이육사의「광야」를 소개한다.


이육사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남한산성 매화(落梅花)터 전설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에서 산등성이 쪽에 낙매화 터라고 불리는 큰 무덤이 있다.


약 600년 전 한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임도령이 있었다. 임도령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도 거르게 되자 광주에 사는 친척 집으로 식량을 얻으러 길을 나섰다.


때는 이른 봄철이었지만, 해가 짧아 임도령이 남한산에 이르렀을 때 날은 어두워졌고 아침도 굶고 먼 길을 걸은 터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산속의 캄캄한 길을 힘들게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바람까지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당황한 임도령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산길을 허둥대다 보니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산속을 헤매던 임도령의 눈에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임도령은 정신없이 불빛을 향해 달려가 보니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임도령은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아리따운 처녀가 나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임도령은 머리끝이 쭈뼛해졌는데, 깊은 산속에 집이 있는 것도 괴이한데, 더군다나 아름다운 처녀 혼자 산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그녀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워 자기도 모르게 여인에게 호감을 느꼈고, 이 오밤중에 더군다나 산속에서 도망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이 밤중에 산속에서 길을 잃으시다니,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날이 새면 소녀가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정신을 잃은 임도령은 홀린 듯 방으로 들어가, 처녀가 차려준 저녁을 먹은 뒤 그녀와 하룻밤의 정을 나누었다.


그녀는 자기가 산속에서 혼자 산 것이나, 임도령이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맨 것이 모두 옥황상제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날이 밝자 임도령에게 서둘러 길을 떠나기를 재촉했다. 임도령은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처녀와 이별하고 그 집을 떠났다.


그러나 자꾸만 아름다운 처녀가 눈앞에 떠올라 길을 갈 수가 없어 임도령은 처녀의 집을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산이 쩌렁 울리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도령은 듣거라!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이다. 네가 품고 잔 여인은 이 산의 백 년 묵은 암구렁이이니라.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길을 재촉하라!"


그 말을 들은 임도령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비로소 처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젯밤 아름다운 그녀와 황홀했던 밤을 잊을 수가 없어 처녀의 집으로 오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살던 초가집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고목 밑에는 머리를 산발한 어젯밤의 그 처녀가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왜 돌아오셨습니까? 산신령의 말대로 저는 오백 년 묵은 암구렁이입니다. 그러나 도령님과의 어젯밤 인연으로 이제 허물을 벗고 승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승천한 뒤 이곳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이니 그 자리에 임도령의 묘를 쓰십시오. 그러면 후일 자손 중에 유명한 장수가 태어날 것입니다"


처녀는 임도령에게 이 말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녀가 말한 대로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비늘은 떨어지자마자 매화나무로 변했다.


그 후 임도령은 장가를 들어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죽을 때 그 처녀의 말대로 남한산의 매화나무 터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가족들은 그 유언에 따라 임도령의 묘를 매화나무 터에 썼는데, 훗날 자손 중에 유명한 장군이 나왔으니 바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화나무 터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 출처 : 광주 시청 홈페이지

매화꽃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결백', '기품',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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