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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Oct 25. 2024

가을 그리고 국화 / 전주 남부시장 춘향전


가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꽃이 국화꽃입니다.

국화!


내가 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도 하지요.


가을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국화꽃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국화는 풍성하면서 

애달프고, 


그윽한 향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두기에 넘치고 넘칩니다. 


국화는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대국, 소국, 폼폼, 구절초, 감국, 등


그중에서 나는 소국을 좋아합니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무더기 무더기 피어있는 그 멋지고 우아한 꽃 앞에 서면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추억이란 비에 흠뻑 젖어버립니다.

구절초

첫사랑은 어느 봄날 아지랑이처럼 그렇게 찾아왔다 국화 향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가을이었습니다. 


판소리 공연에 빠져있던 나는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시장으로 달려갔지요. 왜 판소리 공연을 시장으로 보러 갔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당시 내가 살던 전주 '남부시장' 그러니까 전주천 옆 넓은 공터에 약장수들이 약을 팔기 위해 판소리 공연을 하였습니다. 


춘향전, 심청전이 주된 공연이었고, 연극처럼 막으로 이루어져 한 막이 끝나 무대장치를 바꾸는 동안 사회자가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억양으로 약을 효능을 부풀려 이야기하고, 몇몇 공연자들이 관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약을 팔았습니다.  판매하는 약은 다양했는데, 슬프게도 기억이 나지 않네요.

연분홍 국화

아무튼 나는 그 판소리 공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거의 매일같이 학교가 끝나면 꽤 먼 거리인 남부시장까지 터덜거리며 걸어갔고, 그 공연에 행복했었습니다. 


내가 특히 좋아한 것은 춘향전 중에서 월매가 옥에 갇힌 춘향을 위해 신령님께 기도하는 대목인데, 월매가  부디 이몽룡이 장원급제하여 무남독녀인 춘향이를 구해달라고 신령님께 빌고 있을 때, 거지꼴로 변장한 이몽룡이 찾아오는 바로 그 대목입니다. 

마치 코미디같이 이몽룡과 월매의 말이 빤히 들리는데, 못 들은 것처럼 향단이에 의해 재현되는 세 사람의 대화가 오가고, 마침내 그 거지꼴인 사내가 오매불망 그리던 이몽룡이란 사실에 버선발로 우르르 달려 나간 월매의 소리!

흰 국화

나는 월매의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자네가 정녕 이몽룡인가?"


"어이!"


"어디 좀 보세."


이리저리 살펴보던 월매는 이몽룡을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왔구나, 

우리 사위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가, 

얼씨구나 내 사위야,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았나~"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쉰 듯 걸걸하면서 내 귀에 착착 감겨 마음을 울리던 월매의 소리! 

틀어 올린 머리, 긴 곰방대를 한 손에 들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치마를 질끈 동여맨 월매의 모습! 


나는 그 월매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장사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용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날도 학교가 일찍 끝났고, 나는 서둘러 남노송동에서  남부시장이 있는 전동까지 최대한 빨리 걸어갔습니다. 조금이라도 공연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날따라 공연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내가 서서 볼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나는 어렵사리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공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자꾸만 내 팔을 잡아당기는 겁니다. 구경꾼이 많다 보니 사람들이 떠미는 줄 알고 무대에 눈을 둔 채 툭툭 건드리는 팔을 쳐내었지요. 


"야! 너 여기서 뭐 하냐?"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거기에 우리 반 남자아이가 싱긋 웃으며 서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반 애를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으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재차 그 아이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너 여기서 뭐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습니다. 

참 우스운 일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애를 보고 부끄러울 이유도 당황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떨리던지.


"그냥."


아마 그때 내가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냥이라고, 참 바보 같은 대답이었지요.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이 서로 달랐습니다. 1학년, 2학년 때는 총 9반 중 1반에서 5반까지는 남자, 6반부터 9반까지는 여자 이렇게 편성되었었는데, 3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범으로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은 반이 된 것입니다. 나는 당시 우리 반 남학생들을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 남자애는 부반장이었고, 얼굴이 희고 곱상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풍남문이 있는 전동 사거리로 가지 않고 전주천을 따라 뛰듯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애가 따라올까 봐 겁났던 겁니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주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전주천 변으로 흐드러지게 핀 노란 국화들이 일시에 향기를 가을바람에 실어 내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내 추억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그 아이, 그 아이의 이름도 생각나진 않지만...


학교에서 그 아이를 피하기에 급급했고, 그렇게 남부시장 약장수 공연과 함께 그 아이는 내 추억 속에 오래도록 자리해 있습니다. 그것이 첫사랑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나는 판소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춘향가 중에서 월매가 이도령을 만나는 그 대목을..


화단에 봄부터 가꾼 내 소중한 국화들이 하나 둘 피어나 화려한 가을을 장식해 주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는 이 계절, 국화가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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