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봄이면 고추 두 그루와 천일홍을 함께 심곤 했다.
화단은 작았지만, 햇살이 잘 들었고
언니가 손끝으로 다듬은 그 자리엔 언제나 생명이 피어났다.
113호 언니.
나와는 30년도 넘게 이웃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저 이웃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많은 계절을 함께 건너왔고,
언니는 어떤 날엔 친언니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니는 늘 말했다.
“이 선생, 내가 20대 시절부터 키우던 씨앗이야. 홍은동 살 때부터 줄곧 이어온 아이들이지.”
그 말대로 천일홍은 언니의 청춘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꽃이었다.
그 작은 씨앗은 수십 년 동안 말라죽지 않았고,
매해 여름이 되면 언제나 그 자리에 피어났다.
꽃은 작았지만 색이 참 강했다.
햇빛을 오래 받아도 바래지 않고,
바람에 흔들려도 쉽게 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언니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검사를 받는 줄 알고 갔다던 언니는,
결국 원치 않던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병원에 가면 못 나올지도 몰라.”
그 말이, 예언처럼 남았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요양보호사와도 자주 부딪히며
건강이 빠르게 나빠졌고,
언니는 자신도 모르게 삶의 마지막 문턱에 들어서게 되었다.
언니가 떠나고, 화단 한편에 남은 것은
내가 함께 심어드린 고추 두 그루와 천일홍 한 포기였다.
나는 물을 주지 못했다.
접근이 쉽지 않았고,
어쩌면 마음이 무거워 자꾸만 외면하게 되었다.
햇빛은 뜨거웠고, 비는 오락가락했고,
그 와중에도 천일홍은 바삭바삭 말라가면서도 끝내 서 있었다.
언니처럼.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고 피어 있던 그 모습은
마치 “나 아직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언니는 말했다.
“나는 소고기를 좋아했는데, 한 번도 마음껏 사 먹지 못한 게 가장 후회돼.
이 선생은… 나처럼 살지 마요. 꼭, 잘됐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언니는 연락을 끊었다.
나는 언니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요양병원 침대 위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천일홍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또 어떤 책에는 ‘변치 않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언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씨앗은 다시 거둘 수 있다.
마른 꽃을 손끝으로 톡톡 털어내면
작고 단단한 씨앗이 떨어진다.
다음 봄, 그 씨앗을 다시 심으면
언니의 마음도, 그 삶도 다시 피어나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천일홍을 심는다.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끝,
작은 접시 위 검정 플라스틱 화분에.
꽃은 여전히 붉다.
다만, 예전처럼 강한 붉음은 아니다.
언니가 좋아했던 그 진한 붉은색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나는 안다.
그 색이, 그 향기가, 언니가 남긴 시간 위에 다시 피어나고 있다는 걸.
천일 동안 붉게 피었던 언니의 마음은,
오늘도 내 정원 한편에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