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언니가 떠난 화단을 바라보던 어느 날,
나는 마른 꽃대 하나를 조심스레 잘랐다.
그 속엔 언니가 남긴 작은 씨앗들이 숨어 있었다.
검고 작고, 손끝에서 미끄러질 정도로 가벼운 씨앗.
그러나 그 씨앗은 가볍지 않았다.
그 안에는 언니의 손길, 숨결, 웃음, 다정한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고,
말라버린 꽃을 그대로 두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 씨앗은 한 번도 버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작은 화분을 꺼내어 흙을 고르고,
언니와 함께 고추를 심었던 봄날을 떠올리며
그 씨앗을 살짝 눌러 흙 속에 묻었다.
햇살이 닿는 베란다 끝,
에어컨 실외기 위 철제 걸이 한켠.
해마다 천일홍이 가장 잘 자라던, 바로 그 자리였다.
매일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언니, 올해도 피워볼게요.
작은 씨앗이지만, 기억은 충분히 자랄 수 있을 테니까요.”
처음 며칠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천일홍은 느긋한 아이니까.
언니도 그랬다. 서두르지 않았고, 항상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침, 화분 가장자리에 초록 점 하나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던 그 생명은
언니가 늘 앉아 바라보던 창문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울컥했다.
언니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싹 하나에 언니의 인생이, 고운 마음이,
다시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천일홍은 한해살이 꽃이다.
매해 다시 심어야 한다.
하지만 그 씨앗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해마다 다시 피어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꽃 한 포기 속에 담겨 피어나는 일.
그건 기적이 아니라,
기억이 만드는 계절이다.
지금 내 화단에는
언니의 씨앗에서 올라온 천일홍이 자라고 있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그 잎의 윤기와 줄기의 탄탄함에서
나는 이미 꽃을 본 것처럼 설렌다.
그리고 다짐한다.
언니가 피워온 시간을, 내가 이어갈 수 있도록.
이 작은 씨앗이 또 누군가에게 이어지도록.
변치 않는 마음이 또 한 번 천일을 살아가도록.
씨앗을 심는다는 건,
누군가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꽃이 피면, 나는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3호 언니, 여전히 여기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