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꽃이 피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검정 플라스틱 화분 위,
에어컨 실외기 옆 철제 걸이에 놓인 작은 정원에서
언니의 천일홍이 다시 피었다.
햇살을 오래 품어낸 붉은 구슬 같은 꽃송이.
나는 그 앞에 서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언니가 떠난 뒤,
나는 마른 꽃대에서 씨앗을 모아 조심스레 심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초록빛 싹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언니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긴 시간이 흘렀다.
장마가 오고, 무더위가 찾아오고,
며칠은 잊은 듯 물도 주지 못했지만,
그 아이는 꿋꿋이 자랐다.
처음 꽃봉오리가 맺히던 날,
나는 괜히 들떠서 화분 옆에 쪼그려 앉아
잎의 모양, 줄기의 결, 꽃잎의 색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조금 옅은 것 같기도 하고…”
“작년보다 작네…”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은 기뻤다.
결국 피워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꽃잎은 붉었다.
진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선홍빛.
바람이 불면 살짝 흔들리고,
햇빛을 받으면 투명하게 빛났다.
언니가 좋아하던,
그 붉은빛이었다.
113호 언니.
무더운 여름이면 하얀 감자를 찌고,
쫑쫑 썬 애호박 전에 커피를 곁들이던 사람.
나를 친동생보다 더 아껴주던 사람.
"나는 병원에 가면 못 나올지도 몰라"
그 마지막 말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언니는 요양병원 침대에 계시고,
그 언니의 씨앗은 화분 안에 피어 있다.
언니는 몸은 누워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늘 천일홍 앞에 서서
물 조심스레 뿌리고,
잎을 한번 쓸어주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언니, 올해도 피웠어요.”
“햇빛도 잘 들고요, 바람도 좋고요…
언니가 앉던 자리에서 지금도 바람결이 불어요.”
그렇게 말을 건네는 동안
천일홍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흔든다.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천일홍은 한해살이지만
씨앗은 남고, 기억은 이어지고, 마음은 자란다.
올해도 나는 꽃을 피웠고,
언니의 시간을 기억했고,
내 안의 사랑을 다시 확인했다.
다시 가을이 오면,
나는 마른 꽃을 조심스레 털어
새로운 씨앗을 받아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씨앗을 건네며 말할지도 모른다.
“이건 우리 언니의 천일홍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