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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 하루 그 짧은 시간의 기억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부용 – 하루 그 짧은 시간의 기억


부용이 피었다.
그리고, 어느새 조용히 져 있었다.


화단 한쪽, 잎과 꽃이 하늘하늘 떨리는 그 자리에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꽃인데,
올해는 피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침에 피고 저녁이면 스러지는 부용.


그 하루살이 생을 원망하듯,
나는 그 앞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부용을 처음 만난 건
서른 해도 더 지난 어느 여름이었다.


성남 신흥동의 골목길 초입, 작은 암자.
그날따라 낯익은 풍경 속 낯선 꽃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내 키를 훌쩍 넘는 나무에
얼굴만 한 분홍 꽃이 햇살을 머금고 피어 있었다.


그 청초한 꽃에 이끌려,
나는 처음으로 그 암자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거기,
흰 고무신을 신고 화단으로 걸어오던
맑은 눈빛의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그녀의 이름은 호연.
은사 스님을 따라 대만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머무는 중이라 했다.


“보살님, 이 꽃이 부용화예요.
은사 스님이 대만에서 씨앗 세 알을 가져오셨는데
그중 하나만 이렇게 살아났어요.”

그녀와 나는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었고,
나는 그녀가 내어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 구경도 못 하는 곳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 여름이 끝나기도 전,
그녀는 조용히 사라졌다.


공양주 보살님의 말로는
건강이 악화되어 본가로 돌아갔다고 했다.


약속했던 씨앗도, 다시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른 도시로, 다른 삶으로 옮겨왔다.


그러던 어느 해,
우연처럼 부용의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조심스레 다섯 알을 화단에 심었다.


모두 싹을 틔웠다.


무성하게 자라던 잎 사이로
여름이 깊어지자
그 꽃이 다시 피었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맑고 청초하고,
어딘지 쓸쓸한 기품을 지닌 얼굴.


부용은 무궁화처럼 하루만 피는 하루살이꽃이다.

아침에 피고, 저녁이면 시든다.


하지만 그 하루는
참 이상하게도
한 사람의 얼굴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꽃을 바라보다 보면
운초(雲楚)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조선 순조 때, 평양 감사로 부임한 김이양이
‘부용’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기생을 만나
서울로 데려와 소실로 삼고, 시로 화답하며 함께 살았던 이야기.


그녀는 김이양이 죽자 정성을 다해 삼년상을 치렀고
세월이 흘러 스스로 죽음을 맞을 때
그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천안 광덕리 김이양의 무덤 곁에 조용히 묻어주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마치
내 기억 속 호연 스님의 자취를 닮아 있었다.


꽃처럼 곱고,
한 계절 동안 조용히 마음에 피었다가
슬며시 사라진 사람.


부용은 내 얼굴만큼이나 크고,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꽃이다.


그 품위 앞에서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벌레들이 이 꽃을 아주 좋아한다.


나를 괴롭히는 조그마한 벌레들이
이 꽃 앞에서는 감히 꽃잎을 건드리지 못한다.


잎만, 조심스레 갉아먹는다.

아마 그들도 알고 있었던 걸까.


꽃이 가진 고요한 기품을,
차마 해치지 못할 만큼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하루만 피고 지는 부용은


참 짧게 살지만,
그 하루가 내겐 평생이다.


지금도 내 마음 한 자리에
그 아름답던 부용꽃과 그 여름,
그리고 호연 스님이 피어 있다.


부용은 하루만 피고 지는 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지만,
열흘도 못 가는 붉은 꽃조차 아쉬운데


하루살이꽃이라니,
그 짧음이 더 마음을 울린다.


그래서일까.

여름이 깊어갈수록
꽃은 자꾸만 스러지고,
나의 마음도 조금씩 허전해진다.


가는 여름도, 지는 부용도
안타깝기만 하다.


https://youtu.be/yC93Z_xsTBw?si=mf3uDdBKWroz-H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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