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아욱 – 잊혀진 사랑의 언어로 피어난 꽃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당아욱 – 잊혀진 사랑의 언어로 피어난 꽃


한여름 해가 내리쬐는 길모퉁이, 그늘조차 무성하지 않은 화단 한쪽에서 눈길을 끄는 꽃이 있었습니다.
줄기를 타고 오르며 피어나는 연보랏빛의 꽃들, 마치 오래전 편지 속 필체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그 이름. 당아욱.


어느 해, 나는 그 꽃의 매력에 이끌려 화단에 몇 포기를 심었습니다.
매일같이 바라보며 말을 걸었지요.


“당신은 왜 이렇게도 여린 빛으로 웃는가요.”


하지만 그 대답 대신 찾아온 건, 진딧물 떼와 벌레들.
처음엔 정성껏 닦아주고 물로 씻어내며 지켰지만, 끝내는, 뽑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리고도 화려한 당아욱은, 마치 너무 예뻐서 오래 곁에 둘 수 없었던 사랑처럼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 그리스 신화 속 당아욱 – 헬리오스의 눈물


당아욱(Malva sylvestris)은 학창 시절 교과서보다도 오래된 이야기,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태양신 헬리오스와 요정 크리티(Clytie) 사이의 이야기에서, 당아욱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헬리오스를 사랑했지만 버림받은 크리티는 아홉 날 아홉 밤을 땅에 앉아 태양만 바라보며 눈물 흘리다 결국 해바라기로 변하고, 그 옆에 피어난 보랏빛 당아욱은 그녀가 흘린 눈물의 형상이라 전해집니다.


햇살을 갈망하는 줄기와, 고요한 보랏빛 꽃잎.
당아욱은 사랑을 말할 수 없었던 이의 심장이자 잊히지 않는 감정의 화석처럼 피어난 것이지요.


◆ 잊힌 여신의 속삭임 – 로마의 마르시아 전설

로마의 여신 **마르시아(Marcia)**


또 다른 전설에서는 로마의 여신 **마르시아(Marcia)**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식물의 정령이었으나, 인간들이 전쟁과 탐욕으로 땅을 더럽히자 숲을 떠납니다.


마르시아의 마지막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보랏빛 꽃이 피었고 그 꽃이 바로 당아욱이라 전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아욱은 고대 유럽에서 치유의 꽃, 상처를 달래는 약초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 병충해에 약한 이유 – 너무 여려서 더 슬픈 꽃


그러나 현실 속의 당아욱은, 그 신화처럼 여린 꽃입니다.
진딧물과 잎벌레, 담배나방, 심지어는 녹병과 흰가루병까지…


마치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병충해에 취약합니다.


저 역시 그 아름다움에 반해 키워보았지만, 끝내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당아욱은 그렇게 사랑을 주고, 병을 얻고, 기억 속에 사라지는 꽃입니다.

◆ 꽃말 – 온유, 사랑의 기억, 건강


당아욱의 꽃말은 온유함, 사랑의 기억, 그리고 건강입니다.


서양에서는 피부병이나 기침, 염증 치료에 쓰였고, 동양에서도 한방에서 해독과 진통에 쓰였던 약초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꽃말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 잎과 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 마치 속삭이는 듯한 그 음성입니다.


“나는 잊지 않아. 너와 함께했던 계절을.”

◆ ‘당아욱’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당아욱’은 ‘아욱’이라는 친근한 이름 앞에 ‘당(唐)’이라는 수식이 붙은 형태입니다.


여기서 ‘당(唐)’은 중국 당나라 또는 중국을 지칭하는 고대적 표현으로, 예부터 외래의 것을 가리킬 때 붙이던 말입니다.


즉, ‘당아욱’은 ‘중국에서 들어온 아욱’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우리나라에도 들아욱(Malva verticillata) 같은 자생 아욱이 있었지만, 당아욱은 꽃이 크고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품종이라 구별을 위해 ‘당’ 자를 붙인 것이죠.


이처럼 이름 속에 ‘당’이 붙은 식물로는 당귀(중국산 귀한 약초), 당매자나무(중국 원산의 매자나무), 당호박(서양호박), 당근(당나라 시절 전래된 근채류) 등이 있습니다.

◆ 학명과 속명도 잠시 살펴볼까요?


학명: Malva sylvestris

속명 Malva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부드럽고 진정 작용이 있는 식물을 뜻하는 고어 malako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당아욱이 예로부터 진정·완화 효과가 있는 약초로 쓰였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종명 sylvestris는 ‘숲에 사는’이라는 뜻으로, 야생성의 느낌을 더해줍니다.

✍️ 에필로그 – 다시는 키우지 않겠지만, 다시 피어나길 바라는


당아욱을 다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벌레와 병에 지쳐 결국 뽑아낸 그 기억은, 너무 쓸쓸하고 슬프니까요.


하지만 그 꽃이 피었던 계절,
화단에서 들려오던 벌레 소리조차 살아 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던 시간은
내 안의 오래된 여름처럼,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당아욱은,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고요하고 슬픈 사랑으로, 여전히 피어 있습니다.


https://youtu.be/4Jai3h9ThGI?si=IWwhAurVLZxcEW_F


#당아욱 #아욱꽃 #여름꽃 #꽃에세이 #꽃으로기억하다 #꽃과전설 #치유의꽃 #브런치글쓰기 #식물이야기 #꽃말산책 #꽃이주는위로 #정원일기 #가드닝에세이 #자연을쓰다 #꽃글작가 #꽃의기억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용 – 하루 그 짧은 시간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