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가을 볕이 누그러진 어느 오후, 무주의 산길 임도를 따라 차창 밖으로 스며든 노란 물결이 나를 멈춰 세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송이들이 마치 작은 우산을 펼쳐 든 듯한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다. 내려서 보니 60~150cm에 이르는 긴 줄기 위로 수십 개의 노란꽃이 산방꽃차례로 피어 있었다.
햇살을 온몸에 담은 듯 또렷한 노란빛은,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색을 삼켜 버릴 듯했다.
교과서 속 황순원 선생님의 문장은 이 꽃을 “양산 같은 비”로 노래했다. 소년이 소녀에게 살포시 얹어 주는 그 부드러운 우산은, 햇빛 아래 반짝이는 노란꽃이 들판에 내린 은은한 축복 같았다.
피천득 선생님에게 이 꽃은 ‘인연’을 증명하는 작은 매개였다. “한 송이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는 그의 말처럼, 꽃말처럼 가벼운 들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마타리는 다소 거칠고 투명했다. 산바람에 흔들리며도 꿋꿋이 피어난 그 꽃들은, 사랑을 속삭이는 우산이라기보다 흙먼지와 바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으니까.
어린잎은 고소한 나물로, 뿌리 전초는 예로부터 소염·어혈 치료 약재 ‘패장’으로 쓰인다는 사실이 문득 아득하게 느껴졌다. 된장을 닮은 뿌리 냄새에 이름 붙여진 ‘패장’이란 말은, 이 꽃이 단순히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이처럼 문학이 꽃에 덧입힌 감성과, 내가 몸으로 마주한 현장의 울림이 서로를 비추어 주었다. 햇살을 등진 채 노란 꽃잎을 올려다볼 때마다, 사랑과 인연을 노래한 문장들이 머릿속에 스치는 사이 비로소 꽃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타리꽃, 학명 Patrinia scabiosifolia는 양지바른 산지와 들판, 사질양토에서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7월부터 9월까지 가지 끝마다 수북이 피어나는 이 노란빛은, 꽃말처럼 ‘착한 마음’과 함께 묵직한 생명력을 전한다.
문학 속 감성을 만끽하고 싶다면 황순원과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땅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싶다면 산길 위 마타리꽃 곁으로 걸어가 보시길. 그곳에서 두 배의 울림을 얻게 될 것이다.
https://youtu.be/00lzg76ID60?si=zsFMAzXa0iP8jw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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