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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이 전하는 가을 편지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꽃무릇이 전하는 가을 편지


올해 가을, 내 화단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내게 주었습니다.
지난 봄, 남쪽 고향 지인이 마당에서 캐온 꽃무릇(석산, Lycoris radiata) 15여 그루.
그중 절반은 또 다른 지인에게 나누고, 남은 7그루를 화단 한켠에 심었습니다.


봄날 푸르던 잎은 여름이 오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자리에 마른 풀만 덮여 있었지요.


혹여 밟을세라 살짝 덮어두고 잊고 지냈는데—
엊그제 마른 풀 사이로 새순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단숨에 붉은 꽃 세 송이가 활짝 피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꽃무릇을 내 화단에서 직접 만나니
감개무량이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운명


꽃무릇은 봄에 잎이 돋았다가 여름이면 사라지고,
가을에 꽃대만 솟아 붉은 꽃을 피웁니다.


잎과 꽃이 결코 함께하지 않는 이 생태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한다”는 뜻으로
상사화(相思花) 라 부르기도 했지요.


식물학적으로는 분홍빛을 띠는 상사화(Lycoris squamigera) 와는 다른 종이지만,
이 ‘엇갈린 개화’의 운명 탓에
꽃무릇도 오랫동안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그 애틋한 전설을 함께 나누어 왔습니다.

동아시아 예술 속에 피어난 붉은 전설


중국 – 극락을 밝히는 피안화


중국 불교에서는 이 꽃을 피안화(彼岸花) 라 부릅니다.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 극락으로 향하는 길을
붉게 밝히는 꽃이라 여겨
고승들의 시와 불가의 노래에 자주 등장했지요.


당나라 시인들은 이 꽃을 “저 언덕의 불꽃”이라 불러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깨달음을 노래했습니다.

일본 – 문학과 영화 속 ‘히간바나’


일본에서는 추분 무렵 조상들의 혼을 기리는
히간(彼岸) 절기에 피어나
“히간바나(彼岸花)”라는 이름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고즈넉한 절집이나 묘역을 배경으로 한
와카(和歌)와 하이쿠(俳句)에서
삶과 죽음, 이별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며,
근대 문학가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히간바나〉에서도
운명적 사랑과 죽음을 탐색하는 모티프로 쓰였지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는
묘지 길을 물들이는 붉은 꽃무릇 군락이
이별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영상미로 자주 담겼습니다.

꽃무릇의 꽃말은

‘그리움’,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함’입니다.


잎과 꽃이 엇갈려 피어나듯,

운명처럼 스치기만 하는 사랑과 이별의 슬픔을 품고 있지요.

일본에서는 히간바나, 즉 피안화라 불리며

극락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피어난 이야기와 예술


우리나라에서도 꽃무릇은
가을의 그리움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시와 음악, 사진 속에 자리해 왔습니다.


가을 산사의 묘역을 물들이는 붉은 꽃을 노래한
도종환과 이해인 수녀의 시,
현대 사진가들이 담아낸 불국사·선운사의 붉은 군락….


그리고 노랫말 속의 상사화.

특히 안예은의 노래 〈상사화〉 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전설을
애틋하고도 서정적인 멜로디로 불러주며,
가을의 그리움을 한층 깊게 전해 줍니다.


그 곡을 듣고 있노라면
내 화단에서 붉게 흔들리는 꽃무릇이
마치 오래된 편지를 들고
가을 바람에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내 화단이 전한 가을 편지


이제 매년 가을이 오면
내 화단의 꽃무릇도 붉은 파도처럼 다시 피어나겠지요.


올해 처음 피어난 세 송이는
기다림 끝에 도착한 가을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듯합니다.


“서로 만나지 못해도
그리움은 꽃이 되고,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이 된다.”


가을 햇살 속에 붉게 피어난 꽃무릇—
그 단아한 자태는
오늘도 내 마음에 오래도록 그 편지를 남깁니다.


https://youtu.be/X4lGClp7BMo?si=o16qD3KQ-3V5D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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