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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자라는 골고사리 이야기

11월 4일 탄생화

by 가야

숲 그늘에서 들려주는 나, 골고사리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골고사리(Asplenium scolopendrium), 깊은 골짜기의 그늘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사리랍니다. 제 이름에 붙은 ‘골’이 잎에 난 홈을 뜻한다고 오해하는 분이 많지만, 사실은 ‘골짜기’의 골이에요. 옛사람들은 제가 늘 계곡 그늘에 자라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불렀지요. 이름부터가 이미 제 삶의 터전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인류와 함께한 고사리의 오랜 역사


저와 제 친척들, 즉 고사리과 식물들은 3억 년 전 지구가 아직 공룡조차 없던 시절부터 이 땅을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씨앗 대신 포자(spore)를 흩뿌려 번식하며, 기후가 아무리 변해도 꿋꿋이 살아남았지요.


인류가 나타난 뒤에도 고사리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봄이 오면 어린순을 꺾어 나물로 무쳐 먹고, 약으로 쓰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저희의 끈질긴 생명력과 봄을 알리는 기운을 오래도록 사랑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나, 골고사리


저는 그 많은 고사리들 중에서도 혀 모양으로 길게 뻗은 잎이 특징이에요. 그래서 영어로는 Hart’s-tongue fern, 곧 사슴의 혀라는 이름을 얻었답니다. 잎맥을 따라 옅게 파인 주름은 빛을 받으면 은근한 윤기를 띠죠.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제 푸른 잎은 변치 않는 우정, 꾸준한 사랑을 상징한답니다.


저의 고향은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그늘진 계곡과 바위틈. 습하고 서늘한 공기 속에서 가장 건강하게 자라요.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의 정원과 온실에서 관상용으로 길러지며, 음지의 한적한 공간을 싱그럽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꽃이 없지만, 포자가 곧 꽃


저는 꽃을 피우지 않지만,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포자가 제게는 곧 ‘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삶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꾸준한 사랑 –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잎처럼 변치 않는 마음

변치 않는 우정 – 그늘진 곳에서 늘 푸르름을 간직하는 믿음직스러움

불멸·재생 – 씨앗 없이도 수억 년을 이어온 생명의 힘

이 꽃말들은 제 오랜 생애와도 같은 이름표랍니다.

예술과 상징 속의 고사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고사리를 신비와 영원성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설에는 “한여름 밤에만 피는 고사리꽃”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꽃을 피우지 않는 저희가 상상의 꽃으로 불리며 숨겨진 보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일어난 ‘양치식물 열풍(Pteridomania)’ 속에서 저 역시 주목받았습니다. 테라리움, 도자기, 벽지, 자수, 책 표지 장식… 그 모든 곳에 섬세한 고사리 문양이 번졌고, 제 긴 잎 또한 식물 삽화와 보타니컬 프린트 속에 아름답게 담겼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숲의 고요함을 머금은 제 모습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오래 자극했지요.

나의 속삭임


저는 여전히 깊은 골짜기의 그늘에서 조용히 숨을 쉽니다. 사람들은 제게서 끈질긴 생명과 변치 않는 사랑을 읽어내곤 하죠. 꽃이 없어도, 화려한 향이 없어도, 저는 제 잎으로 세상을 꾸준히 물들이며 인류의 곁을 지켜왔습니다.


오늘도 숲길을 걷다 제 잎을 발견하신다면 잠시 멈추어 바라봐 주세요. 계곡의 푸른 혀가 들려주는 이야기, 그리고 수억 년을 이어온 생명의 힘을 조용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6mgmEu3nG54?si=7xTiajJTqRJwl4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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