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탄생화
나는 인도 북부와 히말라야의 햇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나를 Jambīra(जम्बीर, 잼비라), Nimbuka(निंबूक, 님부카)라 불렀고, 오늘날 힌디어에서는 Nimbu(नींबू, 님부)라고 부르지요.
그들은 내 즙을 소화를 돕는 약으로, 내 껍질을 몸을 정화하는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중국에 건너간 나는 남송 시대 문헌 《嶺外代答》(Ling Wai Dai Da, 영외대답)에 “檸檬(닝멍, níngméng)”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광둥 지방 사람들은 내 껍질을 벗기고 즙을 꿀에 절여 마셨지요. 그들은 나를 사악한 기운을 막고 정신을 맑게 하는 열매라 믿었습니다.
나를 유럽으로 데려간 건 먼 옛날 아랍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낙타 행렬과 배를 따라 나는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지중해로 흘러갔습니다. 11~12세기 십자군이 중동에서 돌아올 때, 나는 그들의 손에 들려 유럽 땅에 심기게 되었지요.
서양 사람들이 나를 재배하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 신맛은 몸을 정화하고 소화를 돕는 약효로 여겨졌고, 내 꽃의 향기와 열매의 노란빛은 부와 세련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나를 정원에 심었고, 오랑제리(Orangerie, 오렌지 전용 온실)라는 전용 건축물까지 지었습니다.
또한 육류와 생선을 즐기던 식탁에서 내 즙 한두 방울은 기름진 맛을 산뜻하게 바꾸는 마법의 비밀이었지요.
15세기 대항해시대. 선원들은 바다 위에서 괴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을 살린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껍질이 두꺼운 나는 오래 보관할 수 있었고, 즙을 짜 오크통에 담아 매일 조금씩 마시게 했습니다. 럼주나 물에 타서 만든 그로그(Grog, 그록)는 갈증을 달래는 동시에 목숨을 지켜주었지요.
영국 해군은 후에 나와 내 동생 라임(Lime, Citrus aurantiifolia, 라임)을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라임을 먹는 사람들(Limey)”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생명을 지킨 과일로 기억되었답니다.
나에게는 여러 형제들이 있습니다.
귤(Mandarin, Citrus reticulata, 柑橘 감귤)은 달콤함으로 풍요와 길상을 전했고,
오렌지(Orange, Citrus sinensis, 橙 등귤)는 태양과 축복의 상징이 되었으며,
라임(Lime, Citrus aurantiifolia, 酸橙 산등귤)은 강렬한 향으로 청춘의 열정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개성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지요.
가야님은 오랫동안 나를 낯선 과일이라 여겼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내 이름조차 생소했으니까요. 그러다 1990년대 초, 드디어 진짜 만남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바뀐 용산 미군부대. 당시 가야님은 지인의 초대를 받아 장교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지인은 우리나라 사람 단 200명만 가진다는 귀한 미8군 패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스테이크를 먹고, 후식으로 주문한 것이 바로 나로 만든 레몬에이드(Lemonade, 檸檬水 닝멍수)였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가야님은 레몬에이드를 마셔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밍밍하고 달기만 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군부대 카페에서 마신 나는 달랐습니다.
달지 않고, 밍밍하지도 않은 상큼한 청량감! 한 모금 머금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져나간 향기와 상쾌한 기운은 가야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가야님이 나를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 레몬(Lemon, Citrus limon, 檸檬 닝멍)이 전하는 꽃말은 “진심으로 사모함”입니다.
때로는 쓰고 새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맑고 투명한 사랑으로 남는 마음. 아시아의 햇살 속에서 태어나 유럽의 정원과 바다를 건너온 나의 여정처럼,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전해집니다.
오늘 한 잔의 레모네이드 속에서, 나의 긴 이야기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ypdE9Lay2hI?si=299JafdqrY5rGN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