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화 – 하얀 꽃 속에 깃든 기억과 온기

가야의 글방

by 가야

목화 – 하얀 꽃 속에 깃든 기억과 온기

우리 아파트 유치원에는 계절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자란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목화였다. 교과서 속 사진으로만 알던 그 목화를 실제로 본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작은 화단 한켠에서 자라던 목화는 싹을 틔우고, 줄기가 올라오고, 어느 날 은은한 미색의 꽃을 피워냈다.
나는 거의 매일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봉오리가 맺힐 무렵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그 어떤 꽃봉오리가 이렇게 단정하고 우아할 수 있을까.

result_2006_8_6_12_2_18_468_31-lysook7.jpg


그리고 마침내 활짝 핀 목화꽃은 부드럽고 정결했다.

20250920_142604.jpg
img_27_845_1.jfif
img_17_1039_16.jfif


아침에는 거의 흰색에 가까운 미색이었지만, 오후가 되면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고, 저녁이 되면 조금 더 짙은 분홍색이 되어 시든다.

img_27_845_12.jfif
img_27_845_14.jfif
img_30_620_1.jfif
img_30_620_12.jfif
img_30_620_28.jfif


하루 사이에도 색이 변하는 그 모습이 신비로워, 나는 숨을 죽이고 꽃을 바라보곤 했다.


시간이 흘러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목화를, 어느 여름날 신트리공원 어린이텃밭에서 다시 만났다.
낯익은 잎사귀 사이로 하얀 꽃이 피어 있었지만, 문이 잠겨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셀카봉을 꺼내 들고, 담장 밖에서 목화를 향해 렌즈를 들이댔다.
처음 써보는 셀카봉이라 서툴렀지만, 그날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하얀 꽃의 표정은 그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목화는 주변의 수세미, 금화규, 나팔꽃, 새깃유홍초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아직 피지 않은 유려한 봉오리, 막 피어난 꽃, 시들어가는 꽃, 그리고 네 갈래로 터진 하얀 목화솜까지.
그 변화의 모든 순간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한참 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목화는 어떤 식물일까


목화(棉花, Cotton)는 아욱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이지만, 보통 한 해만 재배하는 한해살이풀(一年生植物)이다.


학명은 Gossypium spp.로, 전 세계적으로 50여 종이 분포한다.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부지방에서 재배된다.

img_27_845_13.jfif
img_27_847_3.jfif
img_30_620_15.jfif


봄에 씨를 뿌리면 초여름에 은은한 미색의 꽃이 피고,

result_2006_7_6_8_52_11_15_18-lysook7.jpg
result_2006_7_6_8_52_13_546_20-lysook7.jpg
result_2006_7_6_8_52_12_343_19-lysook7.jpg
img_30_620_17.jfif
green-cotton-boll-1634566_1920.jpg
img_27_845_15.jfif


꽃이 진 뒤에는 둥근 열매인 꼬투리(솜꼭지)가 맺힌다.

cotton-flower-1820379_1920.jpg
cotton-flower-4896622_1920.jpg
cotton-1796282_1920.jpg


가을이 되면 그 꼬투리가 네 갈래로 터지며,
속에서 하얀 솜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면화(綿花)다.


이 하얀 섬유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털로,
인류가 의복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가장 오래된 천연섬유다.


인류와 함께한 목화의 역사


목화는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문명에서 이미 재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 천에서도 목화 섬유가 발견되었고,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독립적으로 길러졌다. 그만큼 목화는 인류 보편의 문명적 식물이었다.


목화로 천을 짜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단순한 가리개를 넘어 ‘의복의 시대’를 열었다.
바람을 막고, 피부를 보호하고, 신분을 표현하며, 목화는 인간의 삶 깊숙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조선 초(14세기경) 중국 남부를 통해 전해졌다.
이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붓통 속의 작은 씨앗 하나가 조선 백성의 옷을 바꾸고, 겨울을 바꾸었다.
그 뒤로 목화는 전국으로 퍼져 우리 의복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목화에 얽힌 기억 – 솜이불과 어머니의 손길


목화꽃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시골에서 자라던 시절, 목화꽃이 지고 나면 둥근 열매가 맺혔다.

result_2006_8_1_16_49_1_875_38-lysook7.jpg
result_2006_8_1_16_49_3_343_39-lysook7.jpg


그 다래를 따서 껍질을 벗기면 안에 달짝지근한 물이 고여 있었는데,
그것을 빨아먹으며 놀던 기억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늘 솜틀집에 다녀오셨다.
솜이 눌리면 다시 타서 부풀린 뒤, 속 호청을 싸고 겉 호청을 꿰매 방 안에 펼쳐놓으셨다.


그날 밤, 새로 편 솜이불 속에서 잠들면 세상 그 어떤 난로보다 따뜻했다.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 실을 꿰어 주었고, 바늘끝이 지나가는 소리마다 사랑이 느껴졌다.

웹 캡처_11-12-2022_16131_terms.naver.com.jpeg
웹 캡처_11-12-2022_16215_terms.naver.com.jpeg


예전에는 시집갈 때 혼수 1호가 바로 그 솜이불이었다.
“솜을 두툼히 넣어야 남편이 따뜻하게 잔다.”
어머니들은 그렇게 말하며 딸의 이불에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 시절 목화솜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의 난방이 잘 되어 솜이불을 쓰는 집이 드물지만,
그 폭신하고 포근한 감촉, 새 솜 냄새, 그리고 그 위에 내려앉던 햇살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목화는 나에게 식물이 아니라 기억의 온기다.


예술 속의 목화 – 순수와 노동의 상징


예술가들에게 목화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인간의 노동, 순수, 그리고 평화를 보았다.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는
목화를 따는 사람들의 땀방울을 신성한 노동의 순간으로 그렸다.


미국 남부의 화가들은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을 통해
인간의 희망과 고단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일본 근대화 화가 다케우치 세이호는 목화를 ‘순백의 고요’라 부르며,
욕심 없는 청결한 미학을 그렸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그 순백의 색을 영혼의 평화로 해석했고,
한국의 화가들과 시인들은 목화를 생활의 미와 모성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영국의 시인들은 목화를 ‘인간의 피부에 닿는 시’라고 불렀다.
한국의 시인들은 ‘겨울을 건너는 어머니의 손’이라 표현했다.


그들에게 목화는 단순한 섬유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함이 형체를 얻은 예술의 꽃이었다.

00322721-d140-4a19-b96a-00d38fe5ffd7.png
웹 캡처_11-12-2022_16054_terms.naver.com.jpeg


목화, 하얀 기억의 상징


이제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합성섬유 이불이 세상을 덮지만,
그 시절 솜이불의 포근함과 목화의 향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솜틀집의 따뜻한 김, 방 안 가득 퍼지던 새 솜 냄새,
그리고 그 위에 살짝 내려앉던 햇살까지.

나는 지금도 하얀 목화꽃을 보면 그때의 겨울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손길, 실의 반짝임, 그리고 이불 속의 온기까지.
목화는 내게 여전히 하얀 기억의 꽃,
세월을 건너도 변치 않는 인류의 온기로 남아 있다.



https://youtu.be/7w7yx9at9n8?si=p2ZsyH9xN-yb_AB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늦가을의 환한 불빛/ 환상적인 피라칸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