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의 탄생화
꽃말 : 추상(追想), 추억(追憶)
저는 과꽃입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랍니다. 한 번 심어 놓으면 해마다 자연발아가 잘 되어 봄이면 스스로 싹을 틔우곤 했지요.
하지만 요즘 저는 가야님 화단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제 잎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처음엔 조금만 갉아먹었지만, 나중엔 잎맥 하나 남지 않을 만큼 다 먹어버렸습니다. “제발, 조금만 남겨달라. 그래야 공존할 수 있다.” 저는 바람에 실려 그렇게 속삭였지만, 그들의 식욕 앞에서 제 목소리는 닿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숨도 쉴 수 없었고,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사라졌습니다. 가야님 화단, 수국과 국화가 어우러진 그 앞쪽 작은 공간이 바로 제가 자라던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빈 흙만 남았지요.
옛날에는 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팔꽃, 봉숭아, 분꽃, 채송화와 함께 아이들의 꽃밭 필수 멤버였으니까요. 가을이면 장독대 앞이나 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국화와 키재기를 하며 푸른 하늘을 벗삼았지요. 고추잠자리가 제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아이들이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동요를 부르며 뛰어놀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저의 이름은 과꽃, 학명은 Callistephus chinensis (L.) Nees입니다. 국화과(Asteraceae)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줄기는 곧게 서고 키는 60~100센티미터 정도 자랍니다.
꽃색은 홍색, 자색, 분홍색, 흰색, 청자색 등 다양합니다. 속명 Callistephus는 그리스어 kallos(아름다움)와 stephos(화관)에서 왔습니다. 즉, ‘아름다운 관모를 가진 꽃’이라는 뜻이지요. 옛날에는 저를 Aster(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China Aster, 즉 ‘중국의 별꽃’이라 하지요.
하지만 제 고향은 중국만이 아닙니다. 한국 북부, 함경남북도와 백두산 부근 고원지대에도 제 야생 조상들이 오랫동안 자라왔습니다. 그곳에서는 저의 원종이 아직도 자생하며,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예술가들의 눈에도 자주 담긴 꽃이 되었지요. 프랑스 화가 앙리 판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는 1880년대에 Vase of Asters라는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의 화병 속에서 저는 국화와 장미 사이에 놓여 조용한 가을의 끝을 상징했지요. 빛이 닿지 않는 음영 속에서도 제 보랏빛 꽃잎만은 작게 반짝이며 인간의 ‘추억’을 닮은 색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1912년 Asters에서 저를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면으로 그려냈습니다. 그의 붓끝에서 저는 ‘현실의 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다시 피어난 추억의 색채가 되었습니다.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의 Bouquet of Asters(1905)에서도 저는 등장하지요. 어두운 배경 속에서 부드럽게 피어난 저의 모습은 그에게 ‘사라지는 빛,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영혼’을 의미했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저는 늘 덧없지만 잊히지 않는 존재, 즉 시간과 추억을 품은 꽃으로 그려졌습니다. 아마 그들은 제 안에서 자신들의 기억을 본 것이겠지요.
오래전 사람들은 저에 얽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백두산 아래 작은 마을에 ‘추금(秋錦)’이라는 여인,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가 살았다고 하지요. 그녀는 남편이 생전에 가꾸던 꽃밭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 남편이 나타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라고 말했고, 그날 이후 꽃밭의 흰 꽃들이 하나둘 자주빛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꽃을 과부의 꽃, 곧 과꽃이라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문헌보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저의 꽃말인 ‘추상(追想)’과 ‘추억(追憶)’은 그 전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요즘의 저는 예전의 저와 많이 다릅니다. 색은 더 화려해지고, 꽃잎은 겹겹이 늘어났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들이 다양한 색과 형태로 새롭게 태어나 정원과 화단, 꽃시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옛날 제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홑꽃이 피던 시절, 아이들의 웃음과 장독대의 햇살, 가을 냄새가 가득하던 그때가요.
가야님 화단에서 저는 사라졌지만, 씨앗 몇 알은 아마 흙 속 깊이 남아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 씨앗들이 다시 깨어나 햇살 좋은 자리에서 보랏빛으로 피어날 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오면, 올해의 일들은 모두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다시 새로운 꽃의 시작이 될 거예요.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그 말이 다시 들리는 날, 저는 기억 속에서 또 한 번 피어나겠지요.
과꽃 기본요약
• 학명 Callistephus chinensis
• 원산지 중국
• 영명 China Aster
• 꽃말 믿음, 추억, 성실
https://youtu.be/7uCZl7NpKl4?si=7toA-8SgoenCD3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