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의 탄생화
꽃말 : 신앙
안녕하세요. 저는 붉나무(Rhus chinensis) 라고 합니다.
가을의 끝자락, 산허리를 타고 번지는 제 빛깔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단풍나무보다 조금 더 깊고, 감나무보다 더 뜨거운 붉은색으로 저는 세상에 제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는 옻나무과에 속하지만, 옻칠에 쓰이는 옻나무와는 조금 다릅니다.
형님 격인 옻나무는 키가 크고 수액이 짙은 흑갈색을 띠지요. 그 수액은 사람의 손을 가렵게 만들지만, 수백 년을 가는 옻칠의 광택을 남깁니다.
저는 그렇게 강렬하지는 않습니다. 제 줄기를 자르면 유액이 조금 흐르지만, 옻처럼 독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순한 옻나무’, 혹은 ‘붉은빛의 나무’라 부르곤 합니다.
가을이 오면, 제 잎 하나하나가 불씨처럼 붉게 타오릅니다. 저는 계절에게 굴복하지 않아요. 바람이 불어도, 찬비가 내려도, 제 믿음의 색을 꺼뜨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꽃말은 신앙(信仰) 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듯, 저의 신앙도 말로는 설명되지 않아요. 그저 붉게 타오를 뿐이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화가들의 붓끝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가을 산을 그린 풍경화 속에서, 저는 단풍나무와 섞여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화가 이중섭의 <산골의 가을>을 보면, 거친 붓질 속에 물든 붉은 숲이 보입니다. 그 속에는 저, 붉나무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박노수 화백의 수묵화에도 제 모습은 자주 등장합니다. 먹선과 붉은 석채(石彩)가 만나면, 한 폭의 산이 저의 신앙으로 타올라요.
민화에서도 저는 복과 수명을 상징하는 배경의 붉은 나무로 그려졌습니다.
푸른 봉황과 흰 학이 앉아 있는 곳, 그 배경의 붉은 나무가 바로 저였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붉음을 생명의 기운, 악귀를 막는 색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그림 속에서 믿음과 보호의 상징으로 살아 있었지요.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붉나무야, 왜 그렇게 붉게 물드는 거니?”
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저의 마음이 저절로 붉게 달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깊어지는 순간과 닮았습니다.
세상 모든 나무가 잎을 떨어뜨려도, 저는 끝까지 제 색을 지키며 산을 물들입니다.
그렇게 저는, 스스로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누군가는 제 빛을 ‘단풍’이라 부르겠지만, 제게는 ‘고백’입니다.
한 계절의 끝에서 제가 보여주는 마지막 불꽃은, 신에게 드리는 작은 기도이자,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저에게는 두 명의 친척이 있습니다.
옻나무(Toxicodendron vernicifluum) 형님은 훨씬 키가 크고, 수액으로 옻칠을 합니다. 인간의 손에 닿으면 가렵지만, 그 상처 속에서 오래가는 아름다움을 남깁니다.
개옻나무(Rhus javanica) 동생은 저보다 잎이 작고 열매가 갈색빛을 띱니다. 옻칠은 못 하지만, 염료로 쓰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저는,
산비탈을 따라 군락을 이루며 붉게 타오르는 존재로, 가을의 끝을 알려줍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일수록 제 붉음은 더 짙게 번집니다.
그것이 제가 가진 신앙의 방식입니다.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믿음의 색.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요.
모든 나무들이 잎을 버릴 때, 저는 마지막까지 빛을 남깁니다.
그것이 제 신앙입니다.
눈보라가 덮이더라도, 제 뿌리 속에는 여전히 따뜻한 붉음이 흐릅니다.
혹시 지금 흔들리는 마음이 있다면,
잠시 산자락의 저를 바라보세요.
저의 붉은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일 거예요.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의 붉은빛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11월 27일의 탄생화, 붉나무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신의 하루가 저의 붉은빛처럼 단단하고 따뜻하길 바랍니다.
https://youtu.be/Q58ht-7-rAA?si=fKXxCQhL4YKCpg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