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개일까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고 있다. 정말 재미있다. 술술 넘어간다.
타인의 삶과 마음, 개인의 사생활과 서사를 엿보는 일은 늘 흥미롭다.
그 묘한 호기심과 짜릿함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손이 자꾸 빨라진다.
읽다 보니, 소설 속 12살 꼬맹이 진희에게서 지금의 내가 슬쩍 보였다.
겉으로는 순수하고 맑고 무구한 얼굴(보이는 나)을 하고 있지만,
던지는 질문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고,
하는 말마다 어른 같은 계산을 살짝 숨긴 그 아이(바라보는 나).
그 모습에 흠칫 놀란다.
진희는 어리지만 이미 낯설지 않은 어른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 어린 얼굴로 복잡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자기가 뱉은 말의 여운을 따라가며 누군가를 파악하는 방식.
들킨 것 같은 이 마음이 뭐지.
진희가 조숙한 걸까, 내가 늦은 걸까.
문득 ‘나’도 몇 개인지 헤아려 본다.
하나는, 보이는 나.
생각이 많지 않고, 깊이도 없어 보이지만, 궁금한 건 그냥 툭 던지는 나.
사람들은 이 겉모습 때문에 종종 내가 순진하다고 착각한다.
둘은, 숨은 나.
겉의 충동성을 이용해 모른 척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반응을 슬쩍 확인하는 나.
겉으론 순수해 보이지만, 사실은 꽤 복잡한 의도가 깔려 있는 나.
셋은, 지켜보는 나.
이 둘을 관찰하며 때로는 불편해하고 자책하고,
때로는 후회하다가, 결국엔 다시 조용한 평온으로 돌아오는 나.
‘나’는 이렇게 여러 역할로 등장한다.
쓰다 보니 또 다른 ‘나’들도 보인다.
질문하는 나, 방어하는 나, 웃으며 애쓰는 나, 말하지 않고 사라지는 나.
여러 모습의 ‘나’들 속에서 조금 혼란스럽다.
요즘, 법문을 듣고, 사경을 하고, 숨보기를 이어가다 보면
제자리걸음처럼 맴도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이렇게 많고,
그 ‘나’들이 이렇게 자꾸 변해 간다면,
도대체 어디에 ‘나’가 있을까.
그렇다면 굳이 '나'를 나누어 부를 필요가 있나?
어쩌면 그래서 “내가 없다”라고,
고정된 ‘나’가 없어서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없다’는 건 머리로 이해했지만,
정작 그걸 몸으로 알기엔 아직 멀었다는 걸 절감한다.
들여다보면 매번 다른 내가 나타나지만,
그 ‘바라보는 자리’에 서는 일조차 쉽지 않다.
오늘 숨보기는 이 생각에서 멈췄다.
이제 다시 『새의 선물』을 끝까지 읽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