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주연 : 아담 드라이버) 을 보았다.
짐 자무시는 <천국보다 낯선> <커피와 담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등을 만든 미국 감독이다.
늘 공중으로 뻗쳐있는 흰머리에 '예술가적'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여러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그는 버스 운전사다.
'월요일'(MONDAY)'이라는 커다란 자막 뒤로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눈을 뜬다.
그리고 버스 운전을 하러 간다.버스 승객들은 날마다 바뀌는데 패터슨은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엿듣기도 하고 반복해서 쌍둥이들을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저녁은 아내와 함께 먹고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사실 싫어하는것같은) 불독 '마빈' 을 산책시키며 동네 펍에서 맥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는 비밀노트에 시를 쓴다.
패터슨은 말 수가 적은 잔잔한 남자지만 그의 시는 예민한 시선과 내면의 에너지로 꽉 차 있다.
아내는 패터슨이 쓴 시의 유일한 찐팬이다.아내는 시집을 내보라고 권유하지만 패터슨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다 .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패터슨의 하루는 수요일이 지날 때쯤 한차례 (관객들이) 고비를 맞는다.
한마디로 조금 지루하다.
버스가 고장나고 펍에서 가짜총 소동이 벌어지는 등 조금씩의 변주는 있지만,엄청 '영화적인' 사건사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씬스틸러인 불독 '마빈'이 없었다면 끝까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빈이 친 엄청난(?) 사고 후 영화는 다시 별다를 것 없을 또다른 월요일을 시작하며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끝났어도 영화가 계속된다.계속 생각이 난다고나 할까.
그렇다.뻔한 말일지 몰라도 난 이 영화를 보고 위안을 얻었다 .
<퍼스널 쇼퍼>의 유령처럼 내 주변을 맴돌던 '불안' 에 관대해 질 수 있었다고 할까.
일상의 불안은 반복에 대한 불안일게다.
누구는 새벽같이 일어나 뭔가를 갈고 닦으며 '미라클 모닝!'에 걸맞는 '성장'을 하는데 게을러터진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늘 하던 고된 밥벌이는 딱히 돈벌이는 안되고, 옆에 있거나 옆에 없는 사람은 늘 똑같고,하다못해 냥집사나 견주도 아닌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똑같아서 불안했다.
다수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나아가 추앙정도는 받아야 살맛나는 인생일텐데 이러다간 누구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채 늙을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
짐 자무시가 이렇게 말했다.
<패터슨>은 그냥 평온한 이야기예요. 인생이 항상 드라마틱한 건 아니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대한 영화죠
' 아하! '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게 가져다주는 '평온'이라니.불안이 아니고 평온이라니.
패터슨은 시집을 내건 내지 않건 이미 시를 쓰는 일 자체로 충만해지는 예술가이며 타인의 인정이나 명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시인인 버스 드라이버'처럼 우리들의 객관적 평범함 속엔 절대적 비범함이 늘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 .
그러니까, 5천원 주고 산 알로카시아가 나날이 새 잎을 내고 ,내 착한 짝꿍은 패터슨의 초미녀 아내 못지 않게 나를 편견없이 응원해주며,옆집에 사는 '라온'이란 이름의 똘망똘망한 갈색 푸들은 드디어 나를 보고 짖지 않고 살포시 내 옆에 앉게 된 내 일상의 소소한 변주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깨달음. 짐 자무시는 영화가 끝난 뒤 패터슨에게 향했던 카메라를 나의 일상으로 돌리고 있던 거다 .
영화의 마지막,우연히 폭포수 벤치 앞에서 한 남성에게 빈 노트를 선물받은 패터슨은 '아하!'라고 외치는데,그 의미가 무엇이 되었든 나는 패터슨이 그 노트에 새로 써내려갈 시가 궁금했다.
" 때론 텅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 패터슨에게 빈노트를 선물한 아저씨
그래.누군가가 될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성취할 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나도 빈 노트를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휴대폰 좀 제발 꺼두고. .
PS : 패터슨은 뉴저지에 있는 소도시다.
코로나 직전 (동생이 사는) 뉴저지에 갔었는데,뉴저지에 다시 갈 땐 꼭 패터슨시에 가고 싶다.거기서 패터슨이 늘 앉아있던 작은 폭포수가 흐르는 벤치에 꼭 한번 앉아보고싶다.
패터슨이 열렬히 사랑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는 그 곳에 앉아 시를 썼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의 열혈팬인 짐자무시는 이미 20년전 이 곳에 앉아 이 영화를 구상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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