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올림픽이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는 시차가 없어서, 금요일 저녁 편안하게 올림픽 개막식을 관람할 수 있었다. 4시간 반이나 되는 긴 시간을 다 볼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 보는 생경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시작하기 전부터 언론에서는 "사상 최초로 주경기장이 아닌 곳에서 열리는 개막식", "역대급으로 신선할 예정"이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었다. 파리의 다양한 유적지와 센느강을 활용한 개막식 연출은 그 어떤 올림픽 개막식에서 본 적이 없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서 계속 그 생각이 들었다. "아, 왜 이렇게 산만하고 어수선하지? 공연에 집중이 안되네"
여태까지 내가 봐온 올림픽 개막식은 중앙에 무대가 있고, 그 무대에 모든 이목이 쏠려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구도였다.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중앙무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센느강변의 길거리에서, 파리의 박물관에서, 센느강 위 배에서... 동시에 그리고 아주 산발적으로 공연이 펼쳐졌다. 케이팝 아이돌의 칼군무에 익숙한 나는 뭔가 딱딱 맞지 않는 캉캉춤의 안무 또한 산만하다고 느껴졌다. 모든 것을 중심에서 잡아주는 무언가가 부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조금은 불만스럽게 개막식을 보던 중, 불현듯 독일의 새해 폭죽놀이를 겪으며 들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독일의 12월 31일은 질베스터 (Silverster)라고 불리는 명절이다. 학창 시절 독일어 교과서에서는, 질베스터에 새해 카운트다운과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며 불꽃놀이를 하는 날이라고 설명이 되어있었다. 샴페인을 펑! 하고 터트리는 소리가 액땜을 해주고, 터지는 불꽃이 악귀를 막아주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독일에 오기 전까지 막연히 이 불꽃놀이가 보신각 타종행사에 비견되는 대규모 공연행사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독일에 와서 보니 내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12월 말이 다가오자, 마트 곳곳에서는 폭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주로 여름휴가철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폭죽들이었다. 그리고 12월 31일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부터 멀리서부터 펑!펑! 퓌숙~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온 동네에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불꽃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질베스터의 불꽃놀이는 어디론가 관람하러 가는 대규모 '불꽃놀이행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불꽃을 마련하여, 집집마다 즐기는 '작은 폭죽놀이'였던 것이다. 물론, 수도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는 방송사 행사와 함께 큰 불꽃놀이를 했지만, 독일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터지는 불꽃 보다 집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폭죽을 터트리는 데에 있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독일의 전통이래~'하면서 흥미롭게 집 앞에 터지는 폭죽들을 관람했다. 하지만 12월 31일이 끝나갈수록, 1월 1일이 다가올수록 폭죽소리가 절정을 달했으며, 카운트다운으로 분위기가 격해지자, 마치 전쟁 시 대규모 공습인 양 온 동네가 폭발소리로 요동치게 되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점점 공포심마저 느끼게 되었다. 인간이 느끼는 소음도 소음이지만, 집 앞 공원에 살고 있는 오리, 다람쥐, 토끼 그리고 수많은 새들이 느끼는 공포심은 더 위협적일 것 같았다. 또, 집집마다 다 잔디밭이 있는데 화재 위험성도 매우 커 보였다. 뉴스를 보니 수제 폭죽을 만들어서 폭발 사고가 나거나, 몇몇 무개념한 10대의 장난들로 매년 사고들이 많아져 새해에 사상자가 끊임없이 나온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소음에 대한 공공예절이 민감한 편이다. 유리병 버릴 때 깨지는 소리가 소음을 유발하기 때문에 밤 7시 이후, 주말에는 병을 버릴 수가 없다. 밤 10시 이후에 옆집에서 시끄럽게 한다면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것에 진심이다. 독일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서도 진심이다. 분리수거도 철저히 하며, 전기/물을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고,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주로 이용한다.
하지만 질베스터 때 발생되는 수많은 폭죽 쓰레기들과 매연으로 인한 미세먼지가 일으키는 환경문제는 왜 생각하지 않는걸까? 매주 독일에선 크고 작은 규모의 반전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전쟁 난민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공습소리에 가까운 폭죽소리는 나에게도 공포심을 주는데, 난민들에게는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여러모로 질베스터의 폭죽놀이는 기존의 독일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들과는 상당히 모순된 행위인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억눌렀던 본능들을 질베스터 때 다 표출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일인들이 내로남불인 것인지, 독일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왜 이렇게 문제가 많고, 독일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반하는 질베스터 폭죽놀이를 규제/금지하지 않는지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독일 정부나 지자체들, 각종 협회들도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안전수칙을 잘 지키기를 계도할 뿐, 코로나 시절 외에는 직접적인 규제나 금지를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심지어 코로나 때는 불꽃놀이의 위험성 때문에 금지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면 코로나가 전파되니깐 금지한 것이라고 한다. 일전에는 10대들이 폭죽으로 인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에게 장난으로 폭죽을 쏘는 기상천외한 사고가 있었음에도, 소방당국은 계도할 뿐 폭죽놀이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점이 가득한 폭죽놀이보다는 한국의 불꽃 축제처럼 누군가가 중앙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에서 다 같이 즐기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다. 그러다 한 인터뷰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밀집시키는 대형 (불꽃놀이) 이벤트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사람을 밀집시키면 교통량 증가로 인한 대기오염이 증가하고, 대형 불꽃 또한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중앙집중식 이벤트는 사람들을 수동적이고, 관람자적으로 만들며,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다. 집집마다 하는 불꽃놀이는 개인적이면서,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작은 공동체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머리가 띵하게 느껴졌다. 한국인이 대부분 가고 싶어하는 불꽃축제, 타종행사들을 '수동적'이고, '관람자적'이며, '권력집중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저 인터뷰이의 시선대로라면, 여의도 불꽃축제만 해도, 대기업의 기획 아래 엄청난 자본이 투하되어 과시적이며, 누구나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계층적이라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여태껏 불꽃축제 시즌이 되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자리를 잡을까 고민했을 뿐, 한 번도 그것이 수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독일인들은 나치 경험으로 인해 군중이 밀집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냐며 100%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선임에는 틀림없었다.
같은 날 한국의 부산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드론쇼가 예정되어 있었다. 리허설 영상에서 청룡이 여의주를 머무는 모습을 봤는데 참 멋있었다. 불꽃놀이보다 훨씬 더 친환경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이런 드론쇼를 적극 활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부산 드론쇼가 당일 현장에서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드론쇼를 보기 위해 일부로 부산을 찾은 시민들은 맥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그냥 '관람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드론쇼에 대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쇼를 위해 고액의 숙박, 교통비를 지불한 여행객들도 있었지만, 당연히 보상받을 수는 없었다. 주최 측은 단순 통보하였을 뿐, 사과나 양해가 선행되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인스타에 구청장의 사과문이 올라오는 정도였다. 다행히 드론쇼는 저녁에 진행되었지만, 기다린 시민들은 스스로 무언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새해부터 기분 나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집 앞에 불꽃놀이 하는 거 너무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면서, "한국에서 하는 드론쇼 소음도 없고, 얼마나 멋있는데, 그런 거 하면 얼마나 좋아!" 라고 생각한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대규모 쇼의 수동적이고 관람자적이며, 권력집중적인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사실 그렇다고 독일이 대규모 불꽃놀이나 드론쇼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매년 5월에 라인강변에서는 불꽃놀이가 열린다. (물론 한국에서 열리는 것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고 퀄리티도 떨어진다.) 딱히 기념일은 아니니, 즐기고 싶은 일부 시민들만이 관람하러 라인강변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질베스터는 누구나 다 즐겨야만 하는 명절이다. 애초에 친한 친구들 이웃들과 모여 새해의 운을 기원하는 날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주최하는 큰 불꽃을 관람하며 수동적으로 굴기보다는, 본인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주체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자, 그럼 다시 파리 올림픽 개막식 이야기로 돌아가보겠다. 산만하고 어수선했던 파리 올림픽 개막식 이후에 과거의 올림픽 개막식들이 인터넷상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를 받는 '12 런던 올림픽과 '08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88 서울 올림픽과 '08 베이징 올림픽까지 한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명장면은 다시 봐도 '힙'하면서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베이징 올림픽의 대규모의 북춤은 다시 보니 좀 다르게 느껴졌다.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고, 그 누구도 틀리지 않는 통일성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조금은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모두가 정해진 법칙대로 하나의 동작만을 할 수밖에 없는 매스게임. 아직 매스게임을 하고 있는 나라. 권력이 한 곳으로만 집중된 나라. 그래서 자유로운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나라...
과거의 올림픽 개막식들은 어찌 보면 중앙지향적이면서, 관객들을 수동적이고, 단순 관람자적으로 만들어왔다. 개최도시의 시민들도 TV로 지켜볼 뿐, 주경기장의 관람 수용인원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은 그 틀을 완벽하게 탈피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앙 무대를 없앰으로써, 그동안 중앙으로만 집중되던 것을 좀 더 개방적이고, 참여적으로 만들었다. 거리 곳곳이 무대가 되면서 기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었다. 표를 사지 않아도 집 테라스에서 올림픽을 즐기는 주민들도 있었다. 사실 전 세계인들의 축제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세계인들이 TV로 시청하였음에도, 파리 시민이라면 주경기장에만 한정하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개막식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탈중앙적인 모습이 독일의 질베스터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 것이 유럽 사람들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가 아닐까 싶었다. 중앙에서 규제하고, 단체 행동을 지향하고, 통일된 생각만을 갖고 사는 것보다는, 산만하고 어수선하더라도 하나만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개인 개인의 다양한 삶에 더 능동적으로 임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다양한 군상조차도 담아내며, 그럼에도 '가장 프랑스 답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지난 5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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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라인강변에서의 불꽃놀이 / 출처 : Rhein in Flam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