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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Dec 02. 2024

23. 20대에 독일에 왔으면, 별로였을 것 같아

독일 생활 환상 깨기 

독일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10대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아주 오래된 바램이었다. 20대에 그나마 쉽게 해외 장기 체류를 할 수 있는 방법인 교환학생을 독일이 아닌 미국으로 다녀오게 되었고, 그래서 독일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 꿈이 멀어져 가는만큼,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한국 사회의 불합리함에 지쳐갈 때면, 독일은 합리적이고, 그래도 정의가 살아있을 거라고 마냥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H는 독일이 유토피아가 아님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나와 같은 초,중,고 시절을 보내고, 심지어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그녀와 학창시절에는 그 막연한 환상을 시시콜콜 공유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독일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고 했다. 정말 재미 없고, 활력이 없는 나라인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여기서 재미는 한국 미디어에 소개되는, 단순히 유머감각이 없는 '노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다이나믹을 뜻했다. 모두가 나의 독일행을 부러워할 때, 오직 그녀만이 독일에 크게 실망할 나를 걱정해주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 사회는 아주 느리고 불편하고 답답하게 흘러간다. 내게 가장 많은 조회수를 안겨준 브런치글에서도 이미 독일 사회가 얼마나 불편한지, 하지만 그 불편함을 왜 감수할 수 밖에 없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가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라면,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는 발생하지 않게 해야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동의하는 바이며, 그 것이 독일 사회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희생과 착취가 강요되지 않는 사회에서 대부분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장점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점점 왜 이 독일인들의 '마음 편함'이 어째 '나태함'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독일인들의 '나태함'은 사소한 서비스에서부터 잘 느낄 수 있다. 서비스 종사자들의 희생과 착취를 강요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불편함과 기다림을 감수하였으니, 적어도 서비스의 퀄리티는, 결과물은 완벽해야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서비스 결과물은 완벽은 언감생심이고, 크게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정착 초반 관공서의 관료적이고 나태한 행정 서비스로 인한 에피소드가 없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비단 관공서 뿐만이 아니다. 독일의 은행은 예약 없이 업무를 볼 수 없다. 한국에서 대고객 업무에 종사했던 적이 있는 나로서는 꽤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보였다. 쉴새 없이 밀려오는 고객들로 인해 대기 손님이 늘어나게 되면,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해야한다는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냐는 손님들의 원성을 듣는 것은 덤이었다.) 손님과 충분하게 상담하고, 업무를 정확하게 처리할 시간이 넉넉히 있다는 것은 손님에게나 직원에게나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은행에서는 터무니 없는 실수가 정말로 잦았다. (심지어 1년 넘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도 있어, 지금은 그냥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쓴다는 마음으로 냅두고 있다.) 그리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예약을 잡는 일까지 어려웠고, 본인의 실수에 대한 사과 또한 들을 수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기에 충분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빨리빨리의 마인드를 버리고 충분히 그의 시간과 서비스를 존중해주었는데, 그럼 그는 본인의 업무를 좀더 책임감 있게 처리해야했던 것 아닌가?


얼마 전 남편은 독일에서 셔츠를 맞췄다. 독일은 아직 장인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겠지 싶어, 재단사의 손길을 믿었다. 한국에서는 빠르면 1주, 늦어도 2주 내에 받아볼 수 있었던 것이 4~5주는 걸린다고 했다. 공장이 아닌 장인의 손길로 한땀한땀 만드는 것일까라는 기대를 하며, 새로 나올 셔츠를 기대했다. 그리고 드디어 5주만에 완성되었다고 연락이 와, 피팅을 하러 갔다. 이게 왠걸. 소매를 말도 안되게 좁게 만들어놓아 손목이 들어가지 않아 아예 입을 수 없었다. 재단사는 부랴부랴 단추의 위치를 바꿔보겠다고 했다. 단추의 위치를 바꿔 다는 것은 내가 바느질 해도 2시간이면 걸릴 일 같은데 1주일 넘게 걸린다고 했다. 그러고도 해결이 안되면, 다시 그 부분을 제작해야하는데, (본인이 잘못 만들어놓고) 추가비용이 든다고 했다. 그 이후 3주가 지난 지금, 아직도 재단사로부터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손님이 왕이다'와 같은 정신을 버리고 감정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과, 내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마무리하며 직업/장인 정신을 갖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이야기이다. 직장에서 일부 무책임한 직원들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남편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나태하고 무책임한 독일 사회가 정말 지긋지긋하다며 말이다. 


내가 독일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젊은 인력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직접 경험한 바는 없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성실한 독일인이 있음을, 모두를 일반화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년배들의 이야기를 여러모로 접해보면, 이러한 '나태함' 습성은 꽤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도 본인의 업무가 아니면 (혹은 자신의 업무일지라도) 떠넘기거나, 회피하기 바쁘고, 실수를 저질러도 인정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기 바쁘다고 한다. 그래서 성실함이 몸에 베어있는 한국인들에게 추가 업무나 불합리한 책임이 가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휴가와 병가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장되고 워라밸이 보장되는 것과, 내가 근무하는 시간동안에는 프로페셔널하게 집중해서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인데 말이다. 단순 노동은 중동계 이민자들이 담당하고, 화이트 컬러 업종은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담당해, 이들에 의해 독일 사회 돌아간다는 농담이 전혀 농담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독일 사람들은 상향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계층의 사다리에 올라 타려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에, 굳이 성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부(富)는 운명이기에 거스르거나, 개척할 수 없는 것이라, 그냥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어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무장된 한국인들이 보기에, 그저 무책임하고 복창터지고 답답한 것들을 문화적 차이로 넘기며 참아야만 하는 것인가 싶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현재 독일의 경제위기가 비단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중국 수출 규제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은 전기차로의 전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중이다. 친환경과 기후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 사회에서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뒤쳐졌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도 환경을 생각하는 독일인들이라, 누구보다도 발빠르게 시대의 전환을 준비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으르고, 나태하고, 안일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독일의 직업 사회를 이해하고 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결국 이런 사회 분위기로 인해 독일이란 나라의 경쟁력은 점점 후퇴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나라 전체가 연금을 받아, 안정적으로 삶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노년의 인생 같아보인다. 의욕있고, 욕심이 있는 독일의 젊은 친구들은 미국 등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빅테크 기업이 세상을 흔드는 이 시대에 독일 시총 Top 10 순위에는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들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빅테크/스타트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빅테크는 커녕 일상생활에서의 디지털화도 안되고 있는 판국이다. (독일 사람들은 아직도 디지털 세상의 정보 보호를 믿지 못하고 있다.) 얼마 한 기관에서 조사한 '주재원(Expat)이 살기 좋은 나라 순위'*에 따르면, 53개국 중 독일은 전체 50위로 최하위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 중 디지털 부문에서는 53위 꼴찌를 기록하였으니, 독일만큼 뒤쳐진 나라는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참고로 한국은 작년에 50위, 올해는 23위를 기록하여 가장 높은 상승폭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나는 친구 H가 독일 사회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리고 실망한 이유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 20대 초반, 그 꿈 많고, 하고 싶은게 많던 시절. 상승 욕구로 가득차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그 열정.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20대를 떠올라보았을 때, 나 역시도 H처럼 독일인들의 게으름과 불성실함이 진절머리가 나고, 불만 투성이었을 것 같다. 나는 독일인들이 추구하는 느림, 심심함,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다이나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20대 때 독일에 왔다면, 이 곳에서의 삶이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치열하게 20대를 이미 보냈고, 조금 휴식이 필요한 시점에 독일에 왔다. 한국에서는 나태해지면 안됐었는데, 이 곳에서는 내가 나태해져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다이나믹한 삶에 지쳤던 나에게 조금의 게으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인 그 특유의 성실함을 버리지 못해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있는 중이다. 20대 때는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독일 생활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만족스럽다. 


또, 나는 독일 사회에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금 독일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주재원 와이프 신분이자, 철저한 이방인일 뿐이다. 솔직히 독일인이 나태하든, 독일 경제가 후퇴하든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독일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든 내 알바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반면에 독일에 살지라도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부조리 상황에 분개하고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많다. 어쨌든 나의 조국은 한국이며, 헬조선으로 불릴지라도 내 나라가 잘되고, 좋게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독일이 현재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고,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했으면 좋겠다. 내가 독일을 좋아해서 그렇냐면, 그건 아니다. 나에게 독일은 아주 잠시 머물다갈 공간이지만, 이미 오랜 전부터 정착한 한인들, 새롭게 살아보기 위해 독일에 오게 된 나의 친구들에게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변화된 독일 사회가 내게도 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지도. 물론 과연 안정적인 사회 구조와 근면성실한 사회구성원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가 세상에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출처 : Inter Nations [https://www.internations.org/expat-insider/2024/best-and-worst-places-for-expats-40450] / Expat은 사전적으로는 국외거주자라는 다소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민 및 장기 체류가 목적이 아닌 미션에 의한 단기적인 해외 체류자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주재원으로 의역하여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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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본 크리스마스 마켓,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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