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자의 겨울 루틴 만들기
휴직하기 전까지 나는 늘 바빴었다. 나의 직장은 주 40시간 근무 문화가 잘 정착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야근과의 사투를 벌였다. 그래서 야근이 없는 날에는 이렇게라도 보상 받아야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의 약속 - 특히, 술약속 -을 자주 잡았고, 주말에도 집에서 쉬기보단 외출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것에 집중했다. 휴직 전에는 결혼준비라는 일생의 과업으로 약속을 잡을 시간 조차 없기도 했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새로운 경험들은 늘 도파민 가득한 것들이었지만, 내면의 삶이 단단하고 건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외부 일정들 모두 나의 선택과 의지로 이뤄진 일임에도, 나는 늘 마음 속 한켠에 '내면을 가꿀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갈망했다. 책 읽기, 운동하기, 건강하게 먹기, (무언가) 공부하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휴직을 하면, 독일에 오면, 야근도 없고, 술약속도 없는 삶 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더욱 집중하며 '갓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독일의 여름에는 루틴하게 '갓생을 사는 것'이 나름 할만했다. 남편의 기상시간인 7시 30분에 같이 눈을 떠, 남편이 출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지만, 7시만 되어도 해가 중천에 떠있기 때문에 침대에서 더 뒹굴뒹굴 거리는 것은 무언가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점심 도시락 메뉴는 철저하게 저속노화 식단으로 준비했다. 노년에 치매에 걸려 서로의 병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정제 탄수화물과 단 음식에 익숙한 남편은 늘 도시락 메뉴에 투덜 거렸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싸주는대로 먹어야지. 남편의 성화에 저녁은 조금은 덜 건강하게 먹는 대신, 점심만큼은 꼭 건강식으로 싸서 보냈다.
그렇게 남편을 출근 시키고 나면,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라인 강변을 따라서 조깅을 나가기도 하고, 집에서 홈트를 하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독일어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오후에는 어학원에 가는 김에 시내에 나가서, 아이쇼핑을 하기도 하고,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가서 괜히 노트북에 글을 끄적이다 오기도 하였다. 햇살 아래 내 모습이 제법 '유럽스러워' 보였다. 어학원에 가지 않는 날은 집안일을 하며,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충실했고,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 앞 공원을 산책하며, 서로 못다한 이야기를 할 때도, 각자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대학원생이 되어 학교를 다닐 은근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도 즐거웠고, 운동하는 것도, 건강하게 먹는 것도 모든 것이 의욕적이었다. '갓생 사는 나 자신'에 조금은 도취되어 여느 브이로거들처럼 내 일상을 유튜브에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봐주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도 해보았다.
그렇게 루틴한 하루, 일주일이 흘러가고, 어느새 여름은 가버렸다. 섬머타임이 끝남과 동시에 우중충하고, 으스스한, 길고 긴 독일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활기차고 희망찼던 사람은 여름과 같이 사라져버리고, 마냥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겨울잠만을 갈구하는 사람이 남아버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기상시간에, 전기 장판이 따땃하게 데워준 이불 밖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도시락도 그냥 대충대충 싸기 시작했다. 솔직히 샐러드 같이 차가운 음식을 먹기 싫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운동하던 루틴은 사라지고,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 안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이불 안에서는 SNS에 올라오는 소식들에 집착했다. 인스타, 트위터, 블로그... 하지 않는 SNS가 없었다. 무의미하게 피드만 새로고침하는 아침이 계속되었다. 하필 이북리더기도 여름이 가버린 날 고장나버렸다.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 시간은 유튜브가 차지하게 되었다. 갓생을 사는 유튜브들의 일상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하는데 마음속으로 다짐만 하다가, 어느새 다시 스스륵 잠들어버렸다. 무언가 깜짝 놀라서 눈 떠보면 벌써 점심을 먹고, 어학원에 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물론 그 시간까지도 햇살은 온데 간데 없고,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만 여전할 뿐이었다.
날씨가 흐리고 우중충하면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나는 예전엔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두 번째 겨울을 나기 시작한 요즘, 이유를 모르겠는 한 없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대학원을 낙방하고 나서 목표의식을 상실하였고, 갈 길을 잃어버린 내 심정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밤이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잠을 제때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고, 겨울잠 마냥 늦잠을 자거나, 카페인을 섭취했다. 평소에 카페인에 민감한 신체인지라 커피를 마신 날에는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끝없는 불면의 굴레가 시작되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밤이면 왠지 내가 귀한 휴직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자책을 하며, 내일은 다르게 살거야 마음 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게 눈을 뜬 아침에 따듯한 침대를 벗어나는 것은 너무 어려웠고, 높은 난방비로 최소한의 난방만 하는 집은 너무 추웠다. 이 모든게 지긋지긋한 독일의 겨울 날씨 때문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날씨는 그저 핑계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춥다고 해도 영하 10도를 쉬이 넘나드는 살얼음 같은 한국의 추위만큼 춥지는 않다. 독일인들은 비가 와도, 대충 방수 옷을 입고 조깅을 하고,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이른 아침을 시작한다. 날씨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내 삶의 의욕적인 무언가가, 의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도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건강한 삶을 챙기는 것은 한국에서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내가 짬만 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회사일이 힘들다 만큼 그럴싸한 핑계거리들이 있을까. 이 곳에서는 시간이 차고 넘치는데, 시간이 생기면 꼭 하고자 했던 일들을 시간이 생겨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나의 의지가 부족한 것을 바쁘다는 핑계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핑계들이 사라진 독일의 겨울날. 나는 그냥 게으르고 마냥 겨울잠을 자는 그냥 한 무기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날씨가 유일한 핑계거리인 요즘, 나는 크리스마스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게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날을 비추는 작은 불빛 같은, 무언가 알 수 없지만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마음 속에 심어주는 날이다. 우중충한 독일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도시 분위기가 따뜻하고 포근해진다. 어둡고 춥지만,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피어나는 훈훈하고 몽글몽글한 연기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도 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독일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물들어가는 동안, 나도 집에 작은 트리를 설치하고 조명을 달았다. 그저 거실에 트리하나 두었을 뿐인데, 무언가 다시 열심히 살아보아야겠다는, 무기력하게 지내지 말아야겠다는 어떠한 삶의 의욕이 살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작은 소망의 불빛을 보며 바래본다. 내일은 무기력하게 살지 않기를. 의욕적이고 루틴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이 귀한 휴직 시간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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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함부르크 크리스마스마켓,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