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매 주말마다 나름의 주말 루틴이 있다. 토요일에는 블로그에 시시콜콜한 일상일기를 올리고 일요일에는 월요일에 연재할 브런치 글을 작성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남동생이 한국에서 놀러와 블로그에 올릴 거리도 많아지고, 브런치 주제도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어서 쓸거리가 넘쳐났다. 하지만 즐거운 여행 블로그도, 좌충우돌 일상 일기도 올릴만할 기분이 아니었다. 글이 도저히 쓸 수 없었다. 지난 화요일에 정말 갑자기 그리고 뜬금없이 발표된 계엄 상황과 그로 인한 후속 사건들, 그리고 탄핵 소추 의결 무산까지... 한가롭기만 한 휴직한 주재원 와이프의 라이프를 쓸만할 마음이 안들었다. 그렇다고 브런치에 다소 정치적인 의견을 쓰기도 조심스럽고, 지금 연재하고 있는 주제와도 이질적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내 생각이 퍼져나가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이 기막힌 타이밍에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기자회견 & 연설을 읽었다.
언어의 특성 자체가 강압적으로 눌러서 길을 막으려고 한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말해지는 진실이 있을 것이고,
그런 언어의 힘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난 아무도 아니지만 내 생각 정도는 글로 남겨야겠다' 라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 번 연재는 번외편이다.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글이 아니나, 아무래도 요즘 민감한 사항이니 조금 불편하신 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독자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려는 그 어떤 용기를 가지려고 한다.
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웠다. 우리 과에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 선배들이 오랫동안 졸업도 하지 않고 지박령처럼 학교에 남아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엔 그게 그건 줄도 몰랐다.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다양한 민중가요와 그에 따른 율동(문예 혹은 문선)을 배웠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활동들이 재미있었다. 학교에서는 매년 신입생들이 민중가요에 맞춰 단체로 과티를 입고, 문예를 추는 것이 전통이었다. 불의에 대해 참지 말고 행동해서,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가사는 당연하게 들려 딱히 거부감도 없었다. 처음 농활을 가게 되던 날, 당연히 '농촌봉사활동' 이라고 생각하며, 시골에서 포도 과수원 농사를 지으셨던 돌아가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는데, 선배들은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 학생 연대 활동' 이라며 나름 비장한 각오로 임하길 바랬다. 그리고 농활에서 그 해 떠들썩하던 광우병 파동에 반대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배들과 함께 피켓을 듣고 거리를 걷게 되었다. 내용은 잘 몰랐다. 그냥 다같이 '투쟁!'이라고 외치면, 뭔가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 같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낸지라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것일까, 대학 생활은 다 이런 줄 알았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다른 학교, 다른 과로 진학한 친구들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친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언제 한 번은 학교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 오랜 선배의 추모제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5.18의 참상에 대해선 마음이 아렸고, 다시금 이러한 일이 생기면 안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꿘' 선배들은 그를 계속 그립다고 말했다.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정신을 계속 잘 지켜나가자는 다짐이면 모를까,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때 싸이월드에 저렇게 적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정작 민주열사를 그리워하는 선배들은 본인이 또다른 권위주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 내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들만의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다. 어린 후배들의 목소리를 무시했고, 우리가 '비장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마치 정의롭지 않은 사람인 것 처럼 대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젊은 꼰대'였다. 이를 알게 된 이후, 나의 정치성향과는 별개로,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그 선배들과도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배들은 아마 마지막 학생운동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이후 나는 내 인생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남은 대학생활을 스펙 관리로 바쁘게 보내느라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결국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왠 걸. 입사하고 나니 절차를 무시한 M&A 추진을 반대하는 긴박한 노조활동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집회에 나간 날, 투쟁 시작 전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 나왔다.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노래였는데, 자연스럽게 나는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옆에 있던 동기가 '너는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 라고 물어봤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내가 선택한 직장이라, 내 힘으로 부당한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 화답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는 가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xx노조라고 적힌 깃발 아래서 직장을 지키겠다는 같은 마음으로 거리에서 투쟁을 외쳤다. 민중가요는 대학시절 불렀던 것보다 더 전투적인 가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새 회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언가 비장하게 목소리를 내도, 절차와 신의가 중요하다고 외쳐보아도, 잘 되지 않는다는 실패의 경험만 내 안에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는 나는 거리에서 무언가를 외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자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나라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격하게 분노하였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에 거리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 때 광화문 근방에서 살고 있었다. 퇴근하고 혹은 외출하고 귀가할 때면 늘 촛불 집회를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진 행렬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놀랐다. 다들 민주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비장하지 않게, 마치 나들이하듯, 평화적으로 즐기면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솜사탕을 들고 민주주의에 대해 배워가고 있었고, 어른들은 뜨끈한 어묵과 번데기로 몸을 녹이기도 하며, 민주사회를 갈망하는 구호를 외쳤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레미제라블'의 주요 넘버를 합창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비장하다기 보다는, 결연하면서도 시위 또한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촛불을 켰다. 나를 회의적으로 만들었던 선배들의 얼굴, 실패로 돌아간 노조투쟁의 기억이 촛불에 타버리는 것 같았다. 비폭력적으로, 민주적으로 충분히 시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촛불의 거리는 축제의 장이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촛불을 들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남동생이 독일로 여행 오는 날이라, 독일어 학원 수업도 조퇴를 하고 들 뜬 마음으로 동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에 뜬 소식은 계엄선포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이 번 남동생의 방문 때, 엄마와 여동생도 함께 오라고 제안하였는데, 둘 다 스케쥴이 맞지 않아 남동생만 오게 되었다. 그리고 계엄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오늘 엄마와 여동생도 독일에 왔었어야했는데, 무리하게라도 비행기표를 끊었어야했는데 라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한국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해외로 도피시킬(?) 부끄러운 생각을 한 나와 달리, 많은 시민들은 바로 국회로 몰려가 계엄의 부당성에 항의를 했고, 국회도 빠른 조치로 천만다행히 빠른 시간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한숨은 돌렸지만, 놀란 가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 이후 한국 정세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유럽, 미국, 중동의 정세를 주로 다루는 독일 뉴스인지라 평소에 동아시아의 소식을 듣기 힘든데, 이 날은 한국의 소식이 두 번째 헤드라인으로 떴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접하고, 평소에도 수업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학원 선생님과 친구들은 나를, 한국을 함께 걱정해주었고, 함께 깊이 분개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정부의)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다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이를 여전히 생각하면서 살아야한다는 문제의식을 다시금 던져주었는데, 이렇게 바로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정말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흘렀다. 평소에 어느 정당의 열혈당원도 아니었는데, 이 눈물의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서 정말 당황했다. (물론 평소에도 눈물이 많은 성격이긴하다.) 그리고 주말까지 쉴새 없이 이어지는 혼란한 뉴스들이 나를 조금은 무력하게 했다. 특히 해외에 있어서 더욱 할 수 있는게 없기도 했다. 독일 일부 대도시에도 집회가 있었지만, 개인 사정상 갈 수 없었다. 이런 나를 바라보던 남편은 지금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가 결정해야할 순간에 할 수 있는 일(투표)을 하면 된다고 매우 T스러운 말을 건네며, 내게 너무 "과몰입" 하지 말라고 했다.
과몰입. 과몰입이야말로 내가 잘 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다져온 아이돌 덕질로 인해, 과몰입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쌩판 모르는 아이돌에게 나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 바쳐서 좋아하려면, 과몰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젠 무언가를 좋아할 때, 과몰입하지 않고는 좋아하는게 불가능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내가 수업시간 때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민주주의에, 민주적 가치에 과몰입하고 있었구나. 민주적 가치는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고, 또하나의 덕질의 대상이구나. 내가 아이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민주주의도 내가 지켜주고 싶은, 지켜내고 싶은 것이구나!
요즘 대학생들의 학생 운동 현장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투쟁곡(?)으로서 널리 불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전에도 들은 바 있었다. 이참에 다시 한 번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들어보았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사랑의 대상이 민주주의라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곡은 없는 것 같았다.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나아가 다시 민주적 세상을 꿈꾼다는 내용의 서정적인 투쟁곡이라니. 그리고 이 노래를 즐겨 불렀던 젊은 친구들은, - 대부분 아이돌 덕질 경험이 있어, 나처럼 민주주의에 똑같이 과몰입하는게 어색하지 않은 젊은 여성들은 - 다시 그렇게 거리로 나섰다.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는 노래 가사와는 반대로, 거리에 수많은 '과몰입 동지'가 있는데도, 이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깃발'은 없었다. 깃발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특정 단체나 정당에 소속된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국정농단 사태 때는 촛불을 들었지만, 바람에 촛불이 꺼지면 그만이라는 비아냥에 대비하여, 그들은 꺼지지 않는 빛을 들기로 했다. 바로 과몰입 소녀들이라면 하나 쯤 가지고 있을 법한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말이다. 응원봉의 색깔은 각기 달랐지만, 오늘은 아이돌 덕질을 하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다같이 올바른 민주주의를 향한 마음으로, 같은 대상을, '민주주의를 덕질' 했다. 그건 연대였다. 그리고 나는 새삼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는 가사가 그렇게 서슬퍼렇고, 슬프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한 마음으로 모두가 깃발 아래에 모였는데, 전부 사라져 버리고 깃발만 남게 되었다니... 그 날 밤, 계엄이 빠르게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그렇게 됐었을까...? 과몰입 소녀들은 간데 없고, 응원봉만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을까?
독일에서 영상으로나마 집회의 여러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돌 응원봉에 맞춰, 민중가요 대신 케이팝 가요가 흘러나왔다.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SM의 음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인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SM은 아주 예전부터 SMP라는 장르를 개발해서, 단순히 사랑 노래가 아닌, 사회 문제들을 고발하는 내용의 실험적인 가사를 다수 내놓았었다. 혹자는 이런 부분들이 불호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남녀간의 사랑 타령하는 것보다 이런 노래를 더 좋아했다. 씨랜드 화재 사건(H.O.T. '아이야')이 한참이 지났지만, 비슷한 사고(에프엑스 'Red Light', 레드벨벳 '7월 7일') 가 계속 일어나고, 공수래 공수거(H.O.T. '열맞춰') 일 뿐이라며 돈과 권력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해결사(신화 '해결사)는 나타나진 않지만, 행복(레드벨벳 '행복')을 찾아나서기 위해 다시 노래하고, 정반합(동방신기 '오, 정반합') 을 찾아, 목소리를 크게 내야한다(NCT 127 '영웅') 는 이야기를 나는 더 좋아한다. 이수만 할아버지는 알았을까. 그 30년간의 SMP가 쌓여서 결국 이 시대의 민중가요가 되었다는 사실을. 과몰입 동지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이 시대의 투쟁가요가 된 셈이었다.
대규모 집회가 종료된 후, 케이팝이 흘러나오는 신세대 집회에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반응들도 뒤따랐다. 집회에 참여한 기성세대들이 아는 노래가 없어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부터, 여기가 케이팝 콘서트장인지, 클럽인지 모르겠다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위해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나머지, 우리가 추구하는 '비장한 가치'가 퇴색될 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과몰입 소녀들은 이내 다음 집회를 위해 민중가요를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케이팝 콘서트에 온 것이 아닌, 아이돌을 홍보하러 온 것이 아닌, 민주주의를 지키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외우고, 구호를 외치고, 찬바닥에 오랜 시간을 버티고 앉아있는 것은 아이돌 팬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다. 좀더 정확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민중가요를 숙지하는 일은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 결과에 좌절하지 않고, 다음 집회를 위해 더 단단하게 마음을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정말 정말 오랜만에 민중가요를 들어보았다. "처음처럼", "바위처럼", "날개", "새물", "꿈찾기".... 생각보다 기억이 나는 노래들이 많았고, 심지어 중간중간 떠오르는 문예 동작들도 있었다. 듣다보니, 과거 꿘 선배들이 그 민주열사를 그리워한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촛불을 들든, 케이팝 응원봉을 들든, 민중가요를 부르든, 케이팝을 부르든, 거리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죽음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민중가요에는 아직 그들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그들을 향한 감사한 마음이 그 선배들에겐 그리움이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었음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중-
이미 세상을 떠난 민주열사들이 닦아놓은 토대로, 지금 살아 있는 과몰입 소녀들은 다시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죽은 자들의 뒤를 따라, 산 자들이 세상을 구해보려고 하고 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 그 목소리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아직은 그렇게 믿고 싶다. 독일에서 여의도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SNS에 남겼더니, 친한 언니가 사진을 보내주었다. 집회에 갔더니 우리 학교 깃발이 있었다고, 많은 후배들이 모여있다고, 분위기는 아직 희망적이라고, 먼 곳에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그 깃발 아래 많은 사람들이 늘 함께 하기를, 멀리 퍼지는 목소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계속해서 말해지는 언어의 힘이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소녀'라는 말은 어린 여자아이를 뜻하는 말로, 집회에 참여한 2030여성들을 지칭하기에 다소 부정적인 단어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표현하고자 한 소녀는 어리고 약한 여성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열정을 다 바치는 진취적인 인간을 표현한 단어로서 사용하였다.
*사진 출처 : Tagesschau 인스타 (로이터 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