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이제와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휴직을 하지 말고, 차라리 퇴직을 하고 독일에 올 걸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3년이나 쉬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데 퇴직이라니,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나 또한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이 휴직이 3년동안 해외 생활을 하고도, 아무 조건 없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 이처럼 좋은 복지 제도가 어디있을까. 사실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주재원 생활을 했다면, 퇴직을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이기 때문에, 휴직 말고 퇴직을 할 걸 그랬나 계속 생각이 든다. 일단 언어적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치안도 안전한 편이기 때문에, 이 곳에서의 직장 생활은 큰 무리가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사실 최근에 어학원 친구들의 취업 성공 소식을 들으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독일 경제가 어려워서 취업이 많이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도, 친구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고, 그걸 보고 있으면 나만 정체되어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 직장은 이직시장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직종이다. 그나마 최근 5년 사이 이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아주 드문 경우이다. 정년까지 철밥통처럼 보장된다는 장점은, 이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고용안정성을 확보해주려는 장치이기도 하다. 회사의 인력 구성 재배치를 위해 매년 실시하는 희망퇴직제도는 퇴직금을 꽤나 챙겨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가끔 부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만 40세 이상)에 퇴직을 한 인력이, 업종을 살려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동료 선배들 중 희망퇴직으로 퇴사한 경우가 꽤 있는데, 다들 새로운 직장을 잡은 경우는 드물고, 아이들 양육에 전념하며, 전업 투자(?)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무지게 일을 잘해 롤모델로 삼기도 했었던 한 선배는 퇴직하고 아이들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이러한 행보는 내게 조금 힘 빠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른 업종은 이직을 통해서 소위 말해 스스로의 '몸값'을 올려나가는 일임에 반해, 우리 회사에서의 퇴직은 완전한 경력 중단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내 직장과 직업에 그리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늘 이직을 꿈꿨지만, 불가능한 영역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업종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했는데, 어영부영하다보니 이 곳에서의 근속년수만 채워나가게 되었다. 이직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내게 좋은 핑계거리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안정적인 환경에 그냥 안주해버리는 나를 쉽게 정당화하기에 이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이직을 고려해보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회사에서 제공하는 많은 복지 혜택들을 아직 다 못 누려보았다는 것이 조금 억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회사들이 육아 휴직을 장려하지만,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눈치 없이 쓸 수 있는 온전한 육아휴직 2년'은 우리 회사의 최고의 장점으로도 여겨졌다. 그래서 이를 두고 '여자가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부모님들이 선호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 워딩에는 강한 반감이 있다.) 독일에 오기 전, 자녀를 2명 낳아 4년의 육아휴직을 다녀온 동기들을 볼 때면, 그저 휴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웠다. (육아의 고충이 얼마나 힘든지는 익히 들어 잘 알면서도 말이다.) 남편과 자녀 계획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미래에 쓸지 안쓸지도 모르는 육아 휴직을 못 써보고 퇴직하는게 괜히 아쉬웠다. 그 뿐이랴. 몇 년만 버티면 만 40세부터 가능한 희망퇴직 대상자가 되어 퇴직금을 더 받을 수 있고, 몇 년만 버티면 차장이라는 호칭도 달 수 있다. 이처럼 복지 혜택들은 내가 장시간 '버티고 있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독일에서 3년 휴직기간을 채운 뒤, 육아 휴직을 하고, 만 40세까지 조금만 버텨서 희망퇴직을 하는 것은 내가 회사의 복지혜택을 쏙쏙 다 뽑아 먹고 퇴직할 수 있는 최적의 시나리오처럼 보였다.
그런데 독일 와서는 이 최적의 시나리오가 과연 최고의 선택인지 의문이 많이 든다. 그 혜택을 위해 버티는 수년의 기간동안 어쨋든 나는 남편에게 경제력을 의존해야하며, 업무 역량도 심하게 뒤쳐지는, 경력 단절 상태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휴직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업무처리 방법이 잘 생각이 안난다.) '버티는 것'의 기회비용을 계산해보기 위해서 독일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보았다. 내가 지원해볼 만한 일자리가 몇 개 있었고, (합격한다는 전제 하에) 연봉 수준도 지금 받는 회사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독일의 어마어마한 소득세율에 따라서, 제시 연봉의 반 수준은 세금으로 납부해야할터이니, 실수령 금액은 따져보면 지금 직장이 더 높았다. '퇴직하고 독일에서 일하기' vs. '희망퇴직시까지 최대한 버티기'를 비교했을 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슷했다. 그렇다면 버티기 작전이 더 유리했다. 최종적으로 같은 돈이 수중에 주어진다면, 일을 적게하고 받는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효능감' 측면에서는 버티기 전략은 악수 중에 악수 같아보인다. 버티기만 하면 주어지는 혜택 때문에, 내가 다른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을 정체시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서 얼마 전, 이력서를 한 번 업데이트 해보았다. 다닌 직장이 한 곳 뿐이니 한 장을 꽉 채우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찌저찌 빈 공간을 채우고, 독일어 선생님께 검수를 부탁드렸다. 첨삭이 끝나는대로 한 번 독일 구직 시장에 뛰어들어볼 예정이다. 당연히 내가 합격하리라는 그런 자신감은 전혀 없다. 서류에서부터 떨어진다면, 나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면접이라도 볼 수 있다면, 독일에서 면접을 봤다는 경험치 하나를 적립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합격한다면, 퇴직을 선택할지, 휴직을 이어나갈지 그 때 비교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천천한 시간을 들여서 이직과 퇴직을 고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지금 회사의 휴직제도의 혜택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포기할 혜택들에 대해서 조금은 덜 억울해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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