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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려되었습니다 Dec 18. 2023

합의되지 않은 슬픔이란

펫 로스 증후군

 세상엔 섣부르게 다가갈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꺼질 듯 불어오는 생명을 고이 담아내려 애쓰는 의사와 더 많은 이를 구하려 뛰어드는 의인, 빛나는 미래를 위해 오늘도 머리를 감싸쥐는 수험생까지. 오늘도 별처럼 빛나는 무수한 것들이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위해 타오른다. 


 밝게 빛나는 반대편에는 모든 것을 침잠시키는 꺼진 별들이 놓여 있다. 한 때 너무나 밝게 빛나던, 그러나 구심을 잃었기에 빛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부모를 잃은 자식과, 형제를 보낸 아우와, 반려를 떠나보낸 정인이 그렇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그리고 충분히 가라앉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놓여 있다. 섣부르게 다가갈 수 있는 반려인들이 있다. 이들의 감정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은 슬픔이기에 너무 오래, 그리고 너무 깊게 빠져들수록 강제로 끄집어내곤 한다. 반려인의 상실감은 기울어진 천칭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무게가 쏠리면 사회적인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다. 가장 먼저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은 슬픔보다 의연함을 먼저 배우게 된다.




 사실 나는 아직 잃어보지 못한 장례지도사이기에 너무나 조심스럽다. 언제나 마지막을 대비하라 권유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아직 너무나 관대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아직 이 아이들이 떠나갈 때 '반려동물'이기에 반려를 잃은 고통을 겪을지, 우리 '아이들'이기에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겪을지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린 보호자에게 혹시나 내가 거짓된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까 늘 경계해야 한다.


 직업적인 의식을 떠나, 모든 보호자는 장례식장에서 마땅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물론 길어야 3시간 안에 끝날 위로지만. 장례식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슬픔을 표현하기보다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장례식장에 방문한 보호자에게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기 위해, 한정된 시간이라도 더 압축된 위로를 전하려 노력하곤 한다.


나는 너희라는 세계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이별 증후군'이라고 부르지 않듯, 당연한 현상에 병명처럼 꼬리표를 붙였다는 점에서 반항심이 샘솟는다. 솔직히 왜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아파하고 괴로워한들,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진대. 장례지도사가 바라보는 펫로스 증후군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고이 묻어주는가에 있다.


 반려를 잃은 사람에게 "다른 아이를 다시 키워봐"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반려를 잃은 미망인에게 "얼른 잊고 재혼해 봐"라며 알량한 조언을 건네는 것과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탈력감과 적개심을 동시에 일으키는 마법의 단어다. 사랑하는 이가 힘들어한다면, 사랑하는 이가 사랑했던 시간을 위해 더 올바른 위로를 건네주자. 나의 위로로 저 사람이 분연히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지 말자. 그와 아이가 공유했던 세상은 눈으로 지어낸 따뜻한 보금자리와 같아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저 언젠가 보금자리 밖으로 나왔을 때, 따뜻한 차 한 모금만큼의 여유를 건네줄 수 있도록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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