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딩크족이 될 것 같다.
확신이 생기고 있다.
결혼하고 나니 으레 듣는 말이 있다.
“아이는 언제쯤 생각하세요?”
“저희는 안 낳을 것 같아요.”
그 대답 뒤로는 통상 순수한 호기심의 눈빛을 보낸다. ‘왜?’
어느새 그 왜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왜 우린 점점 출산과 육아와 암묵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문제는 경제력이었다. 당장 지금은 둘이 맞벌이를 하며 양가 용돈에 각자 용돈 고정 생활비 그리고 적금에 주택담보대출금 상환 등을 하고도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면 당장 고정 수입은 절반으로 주는데 돈을 쓰는 사람은 1명이 더 생기는 상황이다,
그랬을 때 우리의 삶이 궁핍해지고 더 이상 여유가 없어지면 우리의 감정선도 틀어질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결과론적으로 행복한가? 그에 대한 답은 아니다였다.
두 번째는 내가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다들 내가 고양이를 케어하는 걸 보면 ‘야, 넌 진짜 아기 잘 키우겠다.’라고 말들 한다. 그러나 난 내 결핍과 기대치 모든 걸 아이에게 쏟아 감정적 학대를 하는 엄마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요즘 육아 프로그램을 보며 느낀 건 정말 그 아이 자체의 문제보단 부모들의 문제가 눈에 띄었다. 부모가 금쪽이인 경우가 다수였다. 그런데 난 금쪽이가 아닐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나 역시 금쪽이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세 번째는 정말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키운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기 행복한 세상인가라는 물음이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괜찮은 세상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빈부격차는 더욱더 커져가고 내 집 장만조차 힘든 요즘 그 아이가 살아갈 집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또 아이가 취업을 위해 노력하고 좌절할 때 ‘하면 되는 세상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인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네 번째는 육아 과정이다. 난 육아를 도와줄 친정이 없다. 남편은 나 대신 돈벌이 전선에 나서야 하니 육아의 8할 이상은 내 몫일 거다. 그런데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아프거나 지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에서 진행하는 돌보미는 신청 대기만 몇 년이라는데 과연 그 몇 안 되는 확률에 도전하는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는 거 아니냐는 물음들에 나는 이런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해결책도 없이 출산과 육아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용기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대는 지났지 않았나.
사실, 고딩 엄빠를 보며 출산과 육아에 대해 한층 더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 단지 어린애들이 낳았다가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계획되지 않은 출산과 육아가 얼마나 많은 이를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줬다 생각한다. 스스로 다듬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육아는 극한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 극한은 결국 고성과 폭력이 난무한다. 어린아이는 그 상황에 방치된다.
그 상황에서 자란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적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그런 물음들은 자연스레 짝꿍에게 향했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키운다던 짝꿍도, 점차 내 고민에 물들어갔다.
그렇게 우린 잠정적으로 아이 없는 삶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