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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갑순이 Dec 27. 2022

지하철

인류애 상실, 인류애 충전 이상한 공간

매일 출근길, 퇴근길 지하철에 오른다. 출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지하철 그 자체에서 오는 피로도에 엄청난 다짐을 하고 길을 나선다. 오늘은 부디 정상적인 사람들만 만나길 간절히 바라며 4분 남짓 떨어진 지하철역으로 걸어간다.


줄 서기 문화가 자리 잡았지만, 안면 몰수한 이들은 줄 선 사람들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를 잡아 제일 먼저 지하철에 오른다. 한 때는 그들이 혹시 모를까 해 말을 해줬었다.


“저기요, 다들 줄 섰는데 거기 줄 아니에요.”


그러나 이런 이들은 통상 나를 ‘뭐야, 이 미친 사람은?’ 눈빛으로 위아래를 흘기며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본인만의 줄을 사수하기에 이젠 포기했다. 그래, 그렇게 먼저 가라. 영원히.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겉옷이 두툼해진 만큼 자리에 앉은 이들은 샌드위치처럼 한껏 포개져 뭉쳐있다. 체격이 왜소한 사람의 옆자리는 모든 이들의 최우선 선호자리다. 그나마 덜 끼어가기에. 좁은 곳에선 힘이 센 이들이 한껏 어깨 힘과 팔 힘을 이용해 사람을 밀어재 낀다. 휴, 생활운동을 여기서 이런 식으로 하는 바지런한 인간들. 요즘 몸에 멍이 많이 드는 이유기도 하다.


최근 가장 경악했던 일이 있었다. 요즘 지하철 파업이다 전장연 시위다 폭설이다 해서 지옥의 1호선은 레벨업을 했다. 줄을 섰음에도 차마 타지 못하고 그저 지나쳐 보낼 때가 많다. 그렇게 한 대를 보내려는 무렵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도약 닫기를 해 자신의 체중과 힘을 실어 사람들을 밀친 뒤 탑승하는 걸 봤다.


이태원 참사로 나라가 떠들썩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건 무리한 탑승을 넘어 가해행위였다. 정말 날아올라 자신을 밀어 넣은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위험해 보여서. 그 사이 왜소한 체격의 사람이 이미 부대낄 대로 부대낀 상황이었다면...? 저 콩나물시루 속 아이가 있었다면...?


어느 날 역시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실려 가고 있었다. 문이 열렸고 무리하게 힘으로 사람들을 보며 이 가운데 참사가 나지 않는 것 역시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정말 탑승 임계치에 다 달았음에도 문간을 부여잡고 프레스 기계처럼 사람들을 밀고 타는 이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건 검은 패딩 무덤 가운데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왜소한 체격의 사람을 발견했다. 정말 곧 혼절할 것 같았다. 저러다 저 사람이 죽겠구나 싶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그나마 공간이 있던 내 쪽으로 그의 손을 부여잡고 끌어냈다. 그 가운데서 끌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게 그 공간에서 뽑혀 나온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고.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이런 상황은 난무하다. 계단처럼 이용하지 않는 오른쪽, 계단처럼 쭉쭉 걸어 올라가는 왼쪽. 출근길 에스컬레이터 줄은 가끔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꽉꽉 들어차있다. 한 명이라도 넘어지는 순간 인간 도미노가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가만히 오른쪽에 서있던 이들이 옆과 뒤를 살피지 않고 무리한 끼어들기를 시도한다. 그럼 무의식에 걸어 올라가던 이는 휘청인다. 그가 휘청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무리한 끼어들기를 한 사람은 그 참사에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책임을 질 수 있긴 한 것일까? 이에 난 깜빡이 없이 무작정 끼어들려는 이들을 제자리로 넣어준다. 대부분 본인의 잘못을 안다는 듯 조용하지만 끝까지 쫓아와 소리를 질러대던 이가 있었다. 이에 면허가 있는지 물었다. 도로 위 깜빡이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그런 차들의 차주인 걸까? 내가 넘어져 쓰러지면 몇 명이 죽는 건지 그 죽음에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생각이란 걸 하고 살라는 일침을 날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때론 이유 없는 따스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복잡한 환승역, 이미 지칠 때로 지친 난 맥없이 승강장에 줄을 섰다. 앞에 서 있던 아저씨가 계속 돌아보며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 힐끔거림이 불쾌할 무렵 내게 건네진 호올스.


“호올스 알아? 이게 호올스야. 아들이 사줬어.”


그 아저씬 아들이 사준 호올스를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그 소중한 호올스를 내게 건넨 이유를 차마 묻지 못한 채 잠시나마 예민했던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생면부지 남에게 호올스를 건네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을까? 그의 힐끔거림은 말을 걸기 위한 도약 닫기라는 걸 깨닫고 난 뒤 예민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안전 불감증, 나만 편하면, 나만 빨리 가면 된다는 이기심, 그리고 호올스. 지하철은 인류애 상실과 호올스.


여유가 없는 세상이지만, 내 주머니 속 호올스 하나 나눌 수 있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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