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깨진 이들이 범인(凡人)을 위로하는 법
TV를 잘 보지 않는다. 정보가 범람하는 지금이라 볼 이유를 잃어서일까. 아마 혼자 살았다면 TV를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언제부턴가 TV로 챙겨보는 방송이 생겼는데, <싱어게인>이다. 시즌 1이 방영될 때는 클립만 챙겨보던 정도였고, 시즌 2가 방영될 때는 종종 생방송을 보는 정도였다. 그때를 돌이켜 보니, 늘 친구와 술집에서 방송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시즌 3에는 생방송을 챙겨보게 되었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와 일주일에 한 번씩 좋은 노래를 듣는 것이 꽤 흡족한 일이었다. 최근 시즌 4가 방영을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싱어게인 4> 2회에 출연한 어느 가수의 이야기이다.
첫인상은 그랬다. 병약한 얼굴, 중심을 잡지 못한 듯 쳐진 입꼬리와 주름들, 마치 삶에서 꼭 받아야 할 보상을 스스로의 실수로 지나친 모습. 저 표정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노래 전 인터뷰 내용 또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작진: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을 앓고 있다고 하셨는데..
55호 가수: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원인을 잘 모르겠어서.
우리는 종종 '무기력'을 느낀다. 삶에서 오는 필연적인 파편들이 너무 날카롭고 거대할 때, 그로 인해 내일조차 보이지 않는 뭉근한 안개가 만연할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낀다. 현대인은 유독 무기력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예상보다 세계가 너무도 복잡하고 거대해진 연유로 길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러한 세계 복판에 낙오된 우리의 마음 또한 유랑이 길어짐에 따라 복잡하고 거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들이 하나씩 얽어져서 충돌할 때, 인간은 날카롭게 깨진다. 그렇게 깨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깨진 것은 곧 위태로워진다. 마치 육상 선수가 다리를 잃고, 가수가 음악을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실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까뮈의 말을 빌린다면,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깨짐의 결과가 위태로움뿐일까. 깨짐은 인간을 곧잘 주저앉게 만들지만, 무작정이고 빼앗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세영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우리는 사실 이미 알고 있다. '깨짐'과 '베어짐'으로 인해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 있다는 것을. 여느 영화나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소중한 무언가를 내어주지 않고서 나아가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두렵다. 얼마나 산산이 깨지게 될지, '칼날'이 되지 못한 채 마침내 마침내 가루가 되는 것은 아닐지를 상상한다. 파편이 알알이 살갗에 박혀 고통만 남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채로 겁을 먹게 될 때면 나는, 앞서 깨진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헤아려본다. 듣고 나서 "나의 깨짐도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번에는 55호 가수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또 어떤 날에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좀 안아 줬으면
다 사라져 버릴 말이라도
사랑한다고 날 사랑한다고
서로 다른 마음은
어디로든 다시 흘러갈 테니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말'은 '마음'과 달리 뱉어진 순간 휘발되고 변질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말은 불안정하다. 사랑도 결국 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사랑 또한 쉬이 우리를 속이고 사라진다. 허나, 이 진실을 깨닫게 되면 앞으로 마주할 사랑은 참으로 어렵고 무거워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 진심 '같은' 말이 되어 버리고, 사랑은 '나를 속이'는 행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수의 말마따나 사랑은 '어디로든 다시 흘러'가는 '사라져 버릴 말'이 되는 것이다. 아, 이것이 55호 가수의 깨어짐인가 보다.
55호 가수가 노래를 하기 전에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가끔, 이 노래가 저보다 더 유명해져 버려서 제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건지, 노래가 저를 부르는 건지 헷갈리는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불러보겠습니다."
아마 화자는 '겸손' 혹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의도한 말이었겠으나, 나는 이 말이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singing) 건지, 노래가 가수를 부르는(calling) 건지'라고 들린다. 가끔 그런 만남이 있다. 가수가 온전히 노래가 되고, 노래가 온전히 가수가 되는 기막힌 만남이. 그런 작품을 마주할 때면, 글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두려워진다. 아마 경외일 것이다. 그들의 노래에는 삶의 질곡이 여실히 느껴진다.
요즘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을 '깨진 사람'이라고 부르곤 한다. 앙앙 울고 난 뒤에 슬며시 일어나, 눈물을 펜 삼아 통증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어진 밀도 높은 이야기는 순홍빛이 되어 우리를 품어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