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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분명히 온다.

by 범수

기다림이 희미해진 시대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절대 스러지지 않는 끈적한 기다림의 기억이 있는가? 배달 음식이라던가 택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좀 더 눅눅한 기다림이다.


물론 나 또한 기다림이 만연한 시대(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던..)에 태어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위 질문을 던졌을 때, 기다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몇 장면은 있다. 나의 첫 기다림은 대부분 그러하듯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에, 어린이집에서 해가 저문 뒤에야 집으로 향했던 적이 종종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아마, 부모님은 바쁘셨기에 집에는 나를 돌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또, 집에 나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기다린다고 해서 가족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나는 나름대로 시간을 삼등분하며 살았다. 첫 분절은 하원 시간이다. 하원 시간이 되면, 11월 바람에 낙엽이 후두둑 떨어지듯, 친구들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괜스레 어린이집 공기가 조금 서늘해진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분절은 방과 후 시간이다. 하원 절차가 끝난 뒤, 어린이집에 남은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블록을 쌓는다던가 원장님과 얘기를 나눈다던가(원장님은 전화를 받을 때 꼭 '네'를 두 번씩 한다. 나는 여전히 '네네원장님'으로 그분을 떠올리고 있다)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공기가 조금은 미지근해졌다. 또 시간이 흘러 남은 이들마저 떠나고 놀거리도 다했을 때. 그리니까, 세 번째 분절. 그때부터가 나에게는 온전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홀로 걸려 남은 낙엽은 미풍에도 쉬이 흔들린다고 했던가. 아이의 시선에서 그 기다림은 꽤나 불안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림의 형태를 더듬거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서야, 나는 집에 갈 수 있었다. 누구와 갔는지, 무슨 차를 타고 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도착한 집이 평소보다 몇 배로 따뜻했었음 선명하다.

시리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옛날이며, 이것이 나의 스러지지 않는 기다림의 기억이다.


기다린다는 게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약속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겪는 '한 장소에 정지하고 있는 상태'가 기다림을 정의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닌가 보다. '바라다'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개인적인 상상력을 조금 더했을 때, 기다림의 조건은 '온전함'이다. 즉, 이때의 '기다림'은 SNS를 하고 노래를 들으며가 아니라, 친구들과 블록을 쌓거나 원장님과 대화를 나누며가 아니라, 온전히 대상에 전념하여 간절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어떤 감정들을 슬며시 깨우곤 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나는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볼 때마다 학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작품을 통해 '시의 맛(?)'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이 작품을 얘기하실 때 시어 '쿵쿵'을 강조하셨다. '너'일지도 모르는 '발자국' 소리와, 너를 기다리며 '가슴'에 울리는 '나'의 심장 소리가 기막히게 겹쳐지는 지점을 시인이 포착한 것이라고. 그 말씀을 하실 때 유독 반짝이던 교수님의 눈을, 그리고 내 가슴에 울리던 쿵쿵 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교수님의 눈빛처럼, 화자의 말처럼, 기다리는 일은 온통 쿵쿵거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또 '기다리는 일은 가슴 애리는 일'이다.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지점에서, 문이 닫히는 '쿵' 소리와 화자의 심장이 내려앉는 '쿵' 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여기저기서 기다림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그런 움직임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바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혹시 한편으로는, 기다림이 괴롭기 때문은 아닐까. 황지우 시인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얼마 전 '쾌락'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마치 저울 같은 것이기에 쾌락은 고통으로 이어지고, 고통은 곧 쾌락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즉, 고통은 쾌락은 1+1 제품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이 없는 삶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어쩌면 기다림과 더불어 오는 소중한 감정들이(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조금씩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오지 않음이 확실한 것을 기다리는 행위에 무슨 기쁨이고 행복이냐. 그것은 멍청함이며, 우리에게 절망만을 선사한다."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라. 애타게 기다렸던 대상이 당신에게 올 확률은 0%였는가. 고백 성공 확률이 0%인 대상에게는 고백조차 하지 않듯이, 우리는 오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대상을 기다린 적이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시인의 말처럼, 대상은 '더디게 더디게' 올 뿐이다. 우리의 기다림을 조금만 더 늘이면 되는 일이다.

얼마 전에 공원 놀이터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초등학생 아이를 봤다. 날이 추웠다. 아이의 얼굴에는 초조와 기대가 하나로 얽혀 있었다. 아이를 지나쳐 한참 공원을 걸으니, 내 옆으로 다른 아이가 헐레벌떡 놀이터를 향해 뛰어간다. 숨이 차서 멈추었다가, 걸었다가, 또 뛰었다가, 다시 걸었다가, 뛴다. 아마 초조와 기대에게 가는 것이리라. 우리의 기다림 대상도 작품에서처럼(또는 위의 아이처럼) '기웃거리다가',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결국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것이다. 분명히 '쿵쿵'거리며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온전한 기다림'을 경험하고, 잃었던 감정을 깨우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P.S. 20년이 더 된 기억 옮겼기에, (그때 느낀 감정은 다르지 않으나) 사건 자체는 다소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곧잘 과장해서 영웅처럼 기억하지 않던가.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나의 과거를 온전히 믿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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