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의 다정함

by 휘유

어느새 코끝 시린 계절이 찾아왔다.

햇살의 따스함과 찬바람의 하모니에 기분이 좋아진다.

겨울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찬 바람이 주는 오묘한 설렘이 좋다.

시원한 공기가 마음까지 상쾌하게 씻어주는 것 같달까.


오랜만에 민경이를 만나기 위해 종로 3가로 향하던 날이었다.

약속 시간은 1시, 그런데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라는 연락을 남겨두고 버스를 기다렸지만, 괜히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졌다. 핸드폰을 보기는 싫어 가방 속에 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소설 '모순'

주인공 진진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 속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단면들이 담겨있다.

나도 읽으면서 나 자신 그리고 엄마와 이모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같은 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네 가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의 심리를 잘 묘사해 낸 이야기이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이 낯설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내 감정이 이렇게 설명될 수 있구나'하고 말이다.

요즘, 나와 내 주변의 화두는 '결혼'인데, 결혼에 관한 대사가 하나 눈길을 사로잡는다.


"결혼은 여자에겐 이십 년 징역이고, 남자에겐 평생 집행유예 같은 것이래. 할 수 있으면 형량을 좀 가볍게 해야 되지 않을까? 열심히 계산해서 가능한 한 견디기 쉬운 징역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얼마 전, 결혼을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졌다.

나는 열심히 계산하다가, '견딜 수 없는 형량'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왜 여자에겐 징역이고, 남자에겐 집행유예일까? 그렇다면 결혼을 왜 하는 걸까?

그래도 궁금하니까, 결혼할 것이다.

그 전에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우선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렸다.

칭얼거림이 계속되자 짜증 섞인 마음이 올라왔다.

'엄마는 왜 아이를 달래지 않을까?'

그때 옆에 있던 승객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아기 사탕 좋아해요? 아기가 기다리기 힘들 거예요~".


순간, 마음이 뜨끔했다.

전광판에 [혼잡]으로 표시가 뜰 만큼 붐비는 버스 안에서 아이와 엄마는 서서 가고 있었다.

창밖도 보이지 않는 키의 아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릴 때는 짧은 거리도 길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그제야 아이의 마음이 보였고, 엄마가 아이를 계속해서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다정함에, 짜증이 올라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자, 아이가 앉을 자리가 생겼다.

할머니, 엄마랑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아이가 이국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한다.

'엄마 look at that !'

창밖을 향해 쉴 새 없이 조잘조잘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 옆자리에 앉으신 아이의 할머니에게 자연스레 물었다.


"아기 몇 살이에요?"

"만 세 살이에요, 캐나다에서 왔어요. 그래서 더 신기할 거예요~"

캐나다에서 왔구나, 엄마의 나라에 놀러온 것이구나.

모든 게 낯설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구나.


그저 들려오는 소리에 자동으로 짜증이 올라왔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관심이 없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의 시선만 더했을 뿐인데 달리 보인다.


우리는 종종 상대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나의 시선으로 사고한다.

한 걸음만 물러서도, 한 번만 시선을 바꿔도 서로를 이해 못 할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도, 나는 또 습관처럼 상을 지었구나.


내가 옳다는 한 생각 버리고, 체력을 기르고, 다정함을 기르고,

주어진 계절을 조금 더 담뿍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해 본다.


KakaoTalk_20251103_200051613_02.jpg 그날 버스에서 내린 후 바라본 창덕궁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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