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수프

수필 계간지 <에세이문학>25년 봄호 수록

by 흰꽃 향기 왕린

그 여자의 수프


남편의 건강 지수가 빨간불이다. 휴지기가 길어지자 입맛도 잃었다. 별의별 노력이 무색하게 음식을 거부하던 그가 다행히 수프는 밀어내지 않는다. 다양한 식재료가 내 손에서 수프로 재탄생한다. 그의 야위고 푸석한 아침이 촉촉해지기 바라며 정성을 들인 덕에 우리 아침 식탁 주메뉴는 수프가 되었다.


대개 수프를 식전 음식으로 여긴다. 나는 모자람 없는 한 끼 식사라고 생각한다. 그와 마주 앉아 뜨거운 수프를 느리게 먹다 보면 세상 근심 너머에서 어느새 편안해진다. 입에 부드럽게 안기는 수프에 빠삭하게 구운 빵을 적셔 먹고 과일 몇 조각으로 입가심하면 우아한 식사를 했다는 포만감으로 흡족하다.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양송이수프를 만들 참이다. 감자와 양송이, 양파를 썰어 놓고 녹인 버터에 양파 먼저 볶기 시작한다. 수프의 깊은 풍미는 양파 볶는 데서 좌우된다고 믿는 나는 긴 나무 스푼을 부지런히 젓는다. 양파가 노릇노릇해지면 감자와 양송이를 넣어 함께 볶는다. 우유 자작하게 붓고 끓이다 핸드 블렌더로 갈아줄 차례. 남편은 재료의 건더기가 느껴지는 식감을 좋아한다. 완전히 드르륵 갈지 않고 조금씩 여러 번 끊어서 가는 게 포인트다. 재료 비율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부수적으로 가미하는 한 방울 팁이 맛을 좌우하기도 한다. 최상의 수프를 얻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고심해야 한다는 얘기다. 재료들이 서로 보듬고 스며 적당히 몽글몽글해지면 저어가며 한소끔 더 끓여줘야 한다.


수프 만들며 치병 중인 남편을 생각한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수프인가 하는 무력감도 있지만, 끓이는 동안 내게 스미는 평화를 뭐라 설명할 수 있을지. 모순이자 또 다른 아픔이라고, 자문자답하는 복잡한 심경 누가 알까.


잔설 남은 산머리에 눈을 주다 한강 작가의 소설 제목을 떠올린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나의 ‘고통이 잠시 멈추는 시간’으로 환치해 본다. 눈이 녹는 동안이 너무 짧아 비현실적일지라도 그 순간에 평화가 있다면 나에게 수프 만드는 잠깐의 딴 세상이 결국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이다. 미식가를 자처하던 남편의 먹지 못하는 고통 생각하며 매일 수프를 끓인다. 그러면서도 그 시간만큼은 남편의 고통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아이러니라니. 고통 안에 있어야만 그를 이해하고 위하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변명이 좀 군색한가. 기실 남편의 고통 안이든 바깥이든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의 통증을 다스려주는 작은 알약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가슴 아프다. 그 아픔마저도 너무 간절해서 그가 옆에 있어도 그가 그립다.


수프 만들 때면 입술에 잘 감겨 읽기 편한 글을 낭독하는 느낌이다. 한없이 순해서 목 넘김이 좋은 수프처럼 술술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담기도 한다. 그 염원이 피워낼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감성 촉초근해져서 완성된 수프도 하나의 작품이라 여겨질 때도 있다.


볼에 수프 담는 일 또한 만드는 과정 못지않게 나의 귀한 의식이다. 코발트블루의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백자기 볼에 따끈한 수프 퍼 담는 순간을 눈이 녹는 찰나라고 말해도 될까. 수프 담긴 볼에 접시까지 받쳐서 식탁에 올린다.


수프 볼에 담긴 고요와 은은한 향기, 보기만 해도 마음 느슨해지는 정경이다. 파슬리 가루 솔솔 뿌리고 건포도 몇 알 올리는데 왜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를까. 무모했지만 순수했던 두 영혼의 합일, 시간은 순간 이동하듯 흘러버렸고 그는 나보다 먼저 병이 왔다. 내가 남편보다는 건강해서 그를 돌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진득하게 기다리는 과정을 거쳐야 풍미 가득한 수프가 되듯 우리가 견디는 이 시간이 값진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버티기도 힘에 부친다.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 다독이며 시름 넣어 둘 마음의 방을 찾는다. 수프를 만들며 잠깐의 기쁨이나마 알아챌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흰꽃 향기 - 왕린





이 글은 남편이 가기 전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그 사람이 떠난 후 이 글이 실린 책이 배달되어 왔어요.

글을 여기에 게재하면서

제 이름을 자연스레 공개하는군요.

위로해 주시고 마음 써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