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지 종종 생각한다.
확신보다는 조심스러운 질문이 늘 앞선다.
너무 평범하지는 않은지,
굳이 남겨야 할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
책장을 넘기다 깨닫는다.
삶은 특별해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견뎌왔기 때문에 기록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등 뒤에서 물가를 맴돌았고,
저수지를 건널 때는 끝내 헤엄치지 못하고
튜브에 몸을 실었다.
내린천의 빠른 물살 앞에서는
뒤집힌 보트 아래 갇혀 한참을 당황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용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나는 언제나 물가를 떠나지는 않았다.
끝내 건너지 못한 강보다
돌아서지 않았던 시간들이
내 안에 더 많이 남아 있다.
서른세 해 넘는 시간을 한 직장에서 보낸 뒤,
관계는 놀랄 만큼 조용히 정리되었다.
오천 개가 넘는 연락처 중
남은 것은 결국
사람의 수가 아니라 마음의 결이었고
진심의 온기였다.
이제는 안다.
모든 관계가 평생을 약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인연은
한 시절을 함께 살아내는 것으로
이미 제 몫을 다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여백餘白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이미 완성된 흰 빛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남겨둔 흰 공간.
무언가로 채워야 할 숙제가 아니라
잠시 머물러도 좋은 자리다.
어둠을 지나온 사람만이
여백의 가치를 안다.
모든 칸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조금 단단해진 마음의 감각이
말없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내 삶이 책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도 나는 한 페이지를 성실히 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제는 조금 믿어보려 한다.
억지로 무언가가 되려 애쓰기보다
한 가지라도 반듯하게 해내며
누군가에게 은은한 긍정의 영향을 남기는 삶.
그것이 내가 그려보는
나의 인생의 책이다.
정수리를 치는 문장 하나에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책을 읽는 평범한 하루가 이어질 수 있다면
내 인생이라는 책은
이미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여백 위에 잉크를 찍는다.
어제의 성취에 머물지 않고
내일의 불안에 앞서지 않으며
오늘이라는 이름의 흰 종이 위에
가장 나다운 첫 줄을
조용히 적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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