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든 책 때문일까? 아니면 서점주인 때문일까? 집으로 가는 내내 기쁨과 흥분으로 콧노래가 절로 났다. '그래, 그곳을 자주 들려야겠어. 다음엔 당황하지 않고 책을 고를 거야.'
이 책오델로는 사람이름이 분명한데 여자보다는 남자이름에 가깝다. 그렇다면 남자주인공일 거야. 어떤 사람일까? 비극이라고 하는데 혹시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집으로 가는 중간에 앉을 곳이라도 있으면 조금만 엿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시멘트길을 지나면 다시 흙길이 곧장 나올 뿐 그런 곳이 없었다.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니 방법은 하나뿐.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에서 '오델로'를 꺼내어 살짝만 보기로 했다.
표지를 넘기니 첫 페이지는 작가소개가 먼저였다. 대충 기억나기로는 셰익스피어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극작가이고 대문호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위대한 사람이 쓴 4대 비극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라면 나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는 증거다. 이 멋진 책을 누군가에게 빨리 자랑하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집에 가자마자 서점에서 산 책이라고 자랑부터 하고 싶은데 다행히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멀리서 수건으로 흙 묻은 바지를 툭툭 터시면서 오시다가 재빠른 나의 자랑질에 우선 "어디 보자."라고 그래도 물으셨다. 얼른 오델로를 보여드렸더니 웃으시면서 "그 책이 안 팔렸는가 보다."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건 아니라고 우기면서 4대 비극 중 하나라서 일부러 골라온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씻으러 들어가셨다. 3천 원만 주시는 바람에 창피만 당할 뻔했다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3천 원으로 꽤 괜찮은 거래를 했다고 여겼기에 그만두었다.
잔뜩 부풀었던 마음에서 김이 빠지면 이런 느낌일까. '오델로'는 '재밌을 거야'라는 서점 주인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정작 재미가 없다고 인정을 하자니 괜찮은 거래에 자존심도 상했다. 거기엔 1막을 시작으로 모두 대사로만 이어지는 이야기인 희곡이 가장 큰 난제였다. 인간의 갈등과 욕망을 대사형식으로 표현한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런 '희곡'을 읽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덮고 싶지는 않았다.
오델로는 아름다운 여인인 데스데모나와 결혼하고 싶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무어인이라 업신여기며 못마땅해한다. 당시의 인종차별은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끝까지 그를 사랑한 그녀가 대단하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했고 다행히 결혼한다. 그다음은 행복한 꽃길만 있어야 하거늘 부하인 이아고에 의해 이 두 사람에게도 비극이 시작된다.
오델로: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자네는 내가 질투나 하며 사는 줄 아는가? 저 달이 수시로 모습을 바꾸듯 언제나 새로운 의심을 일으키면서 말이지? 아냐. 난 의심이 생기면 단번에 해결할 거야.
이아고: 됐습니다. 이제야 장군님께 품고 있는 제 사랑과 존경심을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해도 될 것 같군요. 아직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아고는 말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다. 그의 현란한 대사를 읽다 보면 그는 정의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느껴졌고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아뿔싸 순진한 나는 그의 말솜씨에 그만 속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오델로까지 그러면 안 된다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온갖 말로 오델로를 치켜세우고 칭찬하니 이아고의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어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다.
끝을 향해 갈수록 질투와 의심으로 미친 사람처럼 변해가는 오델로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의주인공은 그러면 안 되는데. 좀 더 똑똑했으면 좋겠다. 어렵게 장군이 된 사람이니 설마 엉뚱한 짓을 하겠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까지 하며 처음의 당당한 그로 변하기를 계속 응원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끝내 그도 자살을 한다. 이런! 의심으로 모든 걸 버리다니!
처음으로 접한 희곡을 어렵고 재미없다고 느끼며 망설였던 읽기를 다행히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재밌을 거야.'라며 책을 건넨 서점주인의 말 때문인 것 같다. 정말 재밌을 거라는 믿음이 주인공 '오델로'를 지지했고 3천 원으로 한 거래에 대한 나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오래전 읽은 이야기를 소환해서 글로 다시 옮겨 보니 소녀였던 그날과 그 느낌이 봄꽃이 환해지듯이 다시 되살아났다. 시간이 흘러 그 소녀의 나이를 훌쩍 널뛰기를 몇 번하고도 남는 어른이 되어서도 '오델로'에 대한 감정은 여전하다. 아마 그때의 나를 만나는 연결통로였던 모양이다.
소소한 책그림 후기 ; 이 글을 쓰면서 그 책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산불이 옮겨 붙어 고향집 창고가 불타면서 가족들과 내 짐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그때부터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