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너무 두렵습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요? 내일 인사과에 나를 때렸다는 사실이 전해질 텐데… 저는 과연 그 형의 반응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내일이 되면 회사에 모든 게 알려지겠죠. 그럼…, 음… 괴롭힘 당하고 당하고 당하고 당했던 사람이기에. 변해야 했지만 결국 변하지 못하고 똑같이 반복해요. 선생님, 저… 무서워요…”
두려움으로 아래를 보며 뒷걸음치던 발. 한 글자씩 눌러가며 덜덜 떨었을 손. 이 글을 쓴 사람은 동준이다. 고3 학생이지만 기업 현장에서 실습생으로 일했으니 취업생이기도 하다. 길고 긴 핸드폰 문자를 받은 담임선생님이 “걱정하지 마, 네 뒤에 샘이 있잖아.”라는 답장을 보내지만 받지 못한다. 동준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처음엔 현장실습생인 어느 고등학생의 단순 자살로 묻힐뻔한 사연이었다고 한다. 은유 작가는 동준이의 실제 사연을 추적하고 관계된 이들과 인터뷰한 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책에 이를 담았다. 회사의 주변인들, 동준이와 같은 어린 실습생들, 부모와 교사들의 입을 통해 동준이의 힘들었던 사회생활과 억울함이 차차 드러나게 된다. 저자는 아이들의 죽음과 함께 남은 자들의 반성과 우리 사회의 남루한 인권 의식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이제 겨우 18살. 우리 둘째보다 더 어리다. 방황하는 사춘기이기도 하지만 부모 밑에서 새 출발을 꿈꾸며 편하게 지낼 나이다. 하지만 동준이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 빨리 돈을 벌어 자립을 꿈꾼 아이였다. 부모 속 한번 썩이지 않을 정도로 착하고 명랑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런 아이의 삶을 무너뜨린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사회생활의 첫 경험에 신났을 여리기만 한 아이의 뺨을 때리며 폭력을 행사한 회사의 형이라는 사람? 무조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사건을 덮기에 급급한 회사? 아직은 학생이지만 어쨌든 취업은 했으니 책임지고 싶지 않은 교육계 사람들? 정작 그들은 피하기에 급급했고 동준이를 외면하고 잊으려고만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짤막한 기사로 읽고 지나쳤을 사건이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곧 잊고 외면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선택한 아이의 사정과 이유를 기사 하나로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을 거다. 바쁜 세상이라며 무관심했던 나는 동준이의 이야기와 다른 학생들의 죽음을 인터뷰한 이 책을 만나고 나서야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늦게서야 미안했다. 사회초년생을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내몬 사회에 분노하고, 투박하다 못해 함부로 대하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많다는 점도 부끄러웠다. 과연 그 가운데 나는 없는 것일까?
끝까지 버텨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두려웠던 동준이. 절박했던 심정은 마지막 문자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이제라도 듣고 있다는 내 양심의 반응이었다. 나는 사회적인 약자를 위해 앞장서 도와줄 정도로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가 나중에 책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겨우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니, 너무 형편없는 사람 같았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동준이와 같은 사회초년생들의 아픈 소식은 끝이 없다.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은 학교에서도 발생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신규 교사의 죽음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지독한 감기가 낫지를 않아 힘에 부치던 아침이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나마 버티고 있었는데 놀란 마음에 기사를 클릭하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버거워서 놓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문자가 마음을 눌렀다.
“버겁다. 다 놓고 싶다.”
“엄마, 나 힘들어.”
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기뻐했을 그가 무엇이 버거워서 다 놓고 싶은 걸까? 대학을 졸업하고 꿈꾸던 일을 하는 하루하루가 분명 즐거웠을 텐데. 그런 그를 거칠게 몰아붙여서 무너지게 만든 건 무엇일까? 이 사건으로 교사들은 자주 모였고 같이 분노하고 슬픔을 나눴다. 말하지 못해 억눌렸던 이야기들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리고 어린 후배의 죽음 앞에서 우린 미안해서 고개를 숙였다.
책임감으로 끝까지 해보려고 애쓸수록 어긋나던 교실 상황은 나중에야 사실로 드러났다. 여린 그에게는 충분히 버거웠을 것이다. 짐작하고도 남을 아픔이 느껴지는 이유는 나도 그와 같은 교사라서다. 그리고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이지만 잊히지 않는다.
힘든 후배가 그 무렵에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나 버티며 참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노력과 인내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차마 견뎌보라는 말은 할 수 없어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적당한 해결책이 나와 위기는 면했어도 후배도 나처럼 마음에 깊은 생채기가 났다. 언젠가부터 나는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 착하게 살지 마.”라고 한다. 이런 행동은 올바르지도, 현명한 대처 방법도 아니다. 다만, 착한 후배가 자신을 먼저 지켰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동준이와 서이초 교사의 사건을 보며 억울한 일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죽음이 던진 질문은 우리가 풀어야 할 사회문제 그리고 교육 현장의 문제로 드러났다. 그래서 남은 자가 된 나는 생각하고 또 고민하며 답을 구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좋은 곳에 갔을 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