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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로 인한 오해

by 시절청춘

글자를 적다 보면, 유독 손끝의 감각이 어색하고 글씨마저 삐뚤어져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있다. 반대로 힘들이지 않고 쓱쓱 써 내려간 글씨가 의외로 마음에 쏙 드는 날도 있다. 오늘은 아쉽게도 전자에 가까운 날이다. 그래서 문득, 나의 글씨체 때문에 겪었던 웃지 못할 기억 하나를 떠올려 보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주변에 예쁜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던 덕분일이었는지, 나 역시 종종 글씨를 예쁘게 쓴다는 칭찬을 듣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칭찬에 은근히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도 있다.) 특히 누나의 단정하고 섬세한 글씨체가 어린 나의 눈에는 무척이나 예쁘게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완벽하게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누나의 글씨체를 흉내 내며 공책에 삐뚤빼뚤 글자를 채워 넣곤 했다. 예쁜 글씨를 쓰고 싶다는 욕심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눌러썼지만, 그 부작용으로 글쓰기 속도가 남들보다 현저히 느려졌다는 웃픈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도 꾸준히 필사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어린 시절의 글씨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은 내 글씨가 예쁘다고, 보기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는 단 한 번도 내 글씨체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글자, 제멋대로 크기가 다른 글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늘 아쉬움이 밀려왔다. 흔히들 말하는, 거칠고 힘 있는 필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늘 내 글씨체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던 반면, 오히려 강렬하고 개성 있는 글씨체를 가진 친구들은 나의 단정함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아마 이런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속마음은 짐작건대, “흥, 자기들끼리 글씨 잘 쓴다고 자랑하는 꼴이라니…”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도 내 글씨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외모와는 다르게, 꼼꼼하고 아기자기한 글씨체 때문에 벌어졌던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학창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예쁘고 아기자기한 글씨체였다는… ㅎㅎ.. 믿거나 말거나!)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2학년 시절로 기억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남고였고, 근처에는 여고가 있었다. 그 여고에는 학교내부에 기숙사가 있어서,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그곳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친구 녀석이 다가와 엉뚱한 부탁을 해왔다. “마음청, 내가 여자친구한테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네가 대신 써줄 수 있어?” 나는 당연히 되물었다. “대신 써달라고? 그냥 네가 직접 쓰면 되잖아.” 친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글씨는 남자 글씨라 사감 선생님한테 혼난대. 그러니까 네가 좀 써줘. 넌 여학생 글씨처럼 예쁘게 쓰잖아” 나는 반문했다. “그럼 봉투에만 내 글씨로 써주면 되는 거 아니야?” 친구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내용까지 전부 다 써줘야 해. 사감 선생님이 의심이 많아서 편지를 뜯어서 읽어본대.”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에이, 설마…”라고 중얼거렸지만, 친구는 진지한 얼굴로 “진짜야. 제발 부탁할게. 대신 보내는 사람 이름도 여학생 이름으로 해주고. 내 여자친구는 센스가 있어서 알아들을 거야. 며칠 뒤에 꼭 데이트하고 싶다고… 제발…” 하고 간절하게 매달렸다. 얼떨결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여학생인 척 최대한 예쁘고 꼼꼼하게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며칠이 흘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녀석이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달려왔다. “야, 너 때문에 아주 미쳐버리겠다! 만나지는 못했고, 답장이 왔는데… 세상에, 진짜 여학생인 줄 알고 답장을 보냈어! 너 나 어떻게 알고 편지 보냈냐고… 왜 자기를 보자고 하냐고… 네 글씨가 얼마나 여자 같았으면! 아, 진짜 미쳐버리겠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배를 잡고 한참 동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친구 녀석은 나중에 여자친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나에게 단 한 번도 글씨 대필을 부탁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매일 글씨를 연습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필사 노트를 꼼꼼히 채워나가는 것도 결국은 예쁜 글씨체를 갖고 싶은 오랜 염원 때문이다. 손가락 수술 이후로 예전만큼 섬세하게 글씨를 쓰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글씨체를 갖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펜을 들고 필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쉬운 길은 없다. 꾸준함은 더딘 발전을 이끌지라도, 결국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다. 멈추지 않는 흐름, 그것이 곧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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