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하는 삶을 꿈꾸며
꽤 오래전 일이다.
폭설로 아침 출근이 무척 힘들었던 날의 기억이다. 일찌감치 차로 출근하는 건 포기하고 마을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이 승객들로 붐볐다. '오늘은 차를 다들 놓고 출근하나 보다' 생각하면서 둘러보니 버스 안에 연세 있는 분들이 꽤 많이 계셨다.
이 엄동설한에 저들은 도대체 아침부터 어딜 가시는 걸까.
(일부 어르신들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일반화한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예는 더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는 중에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어르신들이 갑자기 빨리 걷기 시작한다. 뛰는 분도 계셨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야 하는데 저러다 다치시면 어쩌지. 뭐가 급하셔서.
급하면 뛸 수도 있지, 그분들이라고 늘 한가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일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은 출퇴근 시간도 아니었고 다음 열차를 탄다 해도 약속에 늦지 않을 터였다.
어르신들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다, 혹은 어르신들은 약속을 어겨도 된다 그런 뜻은 아니다. 문제는 왜 이리 급한가 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빨리 달라고 사족을 다는 분들도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선착순, 약육강식, 승자독식으로 점철된 세상이었던 까닭일까.
하지만 그간의 역정(歷程)을 감안하더라도 때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고 조급한 태도가 다른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가는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던데, 50대에는 시속 50km, 70대는 70km라고.
상대적으로 많이 남지도 않은 시간, 게다가 빨리 지나가니 낭비하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거라고, 일단은 이해해 보기로 했다.
무슨 말만 꺼내면 "내 나이 돼 봐라." 하시는 어머니.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볼링과 테니스를 즐기시던 어머니. 지난 3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쩍 기력이 쇠하시고 때로는 우울하게 보이기도 하는 어머니.
그래도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건 마지막 미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박노해 시인은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라고 했지만 과거의 영화(榮華)를 요깃거리로 삼는 것조차 나무라기는 그렇다. 그렇게 과거를 요깃거리로 당신의 남매들과 몇 명의 친구들과 자식, 손주들과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식자(識者)도 성현(聖賢)도 아닌데 주제넘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마는, 조급히 사시는 분들께 하고 싶은 참견은 바로 '관조(觀照)' 하는 삶이다. 관조,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제는 한 발 물러나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얼 더 이루려 하는가. 무얼 더 벌어야 하는가. 무얼 더 알아야 하는가.
관조하려면 먼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나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들을 차차 줄여야 할 것이다. 모임이 많다고 꼭 득이 되는 건 아니다. 먹고 마시고 만나고 대화하는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친목도 어느 정도 한계를 두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 한다.
은퇴는 한자로 '隱(숨을 은)' , '退 (물러날 퇴)'이다.
영어로 은퇴를 뜻하는 'retirement'는 'retire'에서 파생된 단어로 역시 '뒤로 물러나다'라는 뜻이다.
빠르면 40대 후반, 50대부터 겪게 되는 은퇴. 뒤로 물러남이다.
수십 년, 아니 적어도 십수 년 동안 직장 생활한 사람이든, 나같이 번듯한 은퇴식은 꿈도 못 꾸는 사람이든 멀지 않은 노년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일 거다.
왜 뒤로 물러나야 하냐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불쾌해하지는 말자.
물러난다는 말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며 희망을 품어보자.
최근엔 독신도 많고 과거의 정해진 라이프 사이클, '취업-결혼-자녀양육-자녀결혼-은퇴'와 같은 동일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져 각자의 생활방식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
서로 다른 생활방식은 다양한 삶의 양태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다음 단계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우르르 몰려다닐 일도 없고 두런두런 시끄러울 일도 없다.
여기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고 '치고',
이제 살짝 물러나서 편안히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을 충분히 음미하며 소중히 채워갈 것이다.
아주 허술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태평하게 낮잠을 청해 본다. 알람도 설정하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