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에 감사하며
흔하디 흔해서 말하기 싫지만 꺼내보는 MBTI.
난 마지막 항목에서 P와 J의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한다. 예전엔 P가 강했고 지금은 J가 더 강하다.
P가 즉흥적이고 J가 계획적이고 이런 것은 상대적이라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내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얘기하려고 한다.
약간 반항적이고 다소 엉뚱한 모범생이라고나 할까. 늘 엄마에게 반항하면서도 결국은 엄마가 원하는 걸 해왔던 나.
대학 입학 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지만 자체 휴강을 한다거나 휴학을 한다거나 그런 걸 시도한 적은 없다. 대학원 입학 후 잠깐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엄마에게 손을 벌린 게 우리 집 딸 들 중에선 그나마 파격이었다.
그 후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대단히 J스러워졌다. 비자발적 J인 셈.
경제권은 부지불식간에 내가 쥐고 있었고 집을 사고파는 일, 가족여행 일정을 짜는 것도 내게 맡겨졌다.
아이들 사교육, 입시, 진학 문제 역시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몫이었다. 선행학습이나 과도한 사교육은 절대 시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전권을 쥐게 되니 기분이 좋았을 만도 한데, 한편으로 권한이 주어지면 책임이 따르는 법, 부담도 컸다.
어쨌든 대한민국 4인 가구의 대충 그랬을법한 여정을 거쳐왔고.
난 이제 '나 하나 잘 건사하자'를 모토로 살려고 한다.
나를 잘 건사하려니 제일 시급한 문제가 먹는 거, 식생활이다. 소량을 먹는 편이지만 식사를 잘 거르고 저녁에 몰아서 먹는 타입이었다. 식사시간도 매번 다르고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아이들과 동거중일 때는 야식도 빈번해서 역류형 식도염도 생겼다. 음주도 간혹 즐기는 편이다.
위기감을 느꼈다. 코로나 발병 이후 몸상태가 나빠져서 의사가 장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야식과 폭식은 끊고 원래 하던 간헐적 단식은 지키면서, 몸에 안 좋은 것은 자제하고 피할 수 없다면 가끔씩만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운동. 하아... 운동은 끔찍이 싫어해서,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고 집에서 꼼지락꼼지락 홈 트레이닝 정도는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취침 시간을 정했다. 밤이 될수록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당연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늘 버거운 나. 무조건 12시 취침, 늦어도 7시 기상.
과거에 지독한 불면을 겪었고, 2,30 대 때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새벽에야 잠들곤 했었다.
수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법. 적절한 수면은 노화를 늦추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다.
저녁 약속도 되도록이면 일주일에 몇 번으로 한정하고 귀가 시간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독서, 카페에서 글쓰기, 그 외 집안일 등도 시간을 정했다. 방학 생활계획표만큼 촘촘하지는 않아도 대체로 느슨한 나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루틴'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십 수년 전 미국 거주 때다. 한인들은 대화 중 영어 단어를 간간이 끼워 넣곤 하는데 루틴이 자주 언급됐다. 왜 굳이 루틴이라고 말을 할까 궁금했다. '일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루틴에는 순서와 반복의 뉘앙스가 있어서 단순히 일상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하다.
영어 'routine'의 어원을 보면 이해될 것이다. routine은 라틴어 'rupta'(길)에서 유래하는데 이후 정해진 길 또는 절차를 뜻하다가, 반복되는 일련의 행동이나 과정으로 의미가 발전했다. 그래서 보통 '아침 루틴', '운동 루틴'이라고 쓴다.
그런데, 왜, 미리 정해진 순서 대로,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건 질색인 내가, 남들 짜장면 먹을 때 꼭 혼자만 짬뽕을 먹던 내가, 어쩌다가 스스로 루틴을 만들어 그 루틴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가.
과거 불안장애를 겪은 적이 있었다. 불안 장애를 겪는 사람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계획에 없던 일이 갑자기 생기면 긴장이 높아져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운전을 하다가도 옆의 차량이 갑자기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돼서 진땀이 흐른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코르티솔(흔히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불린다)의 분비를 증가시켜 수면부족, 우울증, 불안장애 등을 일으킬 수 있다.
무리 없이 짜여진 일과, 즉 루틴을 지키는 것은 육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불확실성은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해도, 잠시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루틴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거나, 잘 지키는데도 성과나 보상이 없다고 절망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결국은 나를 위함 아닌가. 언제나 내가 중심임을 잊지 말자. SNS에 올리거나 달성한 목표를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함도 아니니까.
그러니 운동, 학업, 업무 등 성과를 내기 위한 루틴에 내 일상의 70~80% 정도만 내어주면 충분하다. 나머지 시간에는 혼자만의 휴식을 취한다던지, 친구들과 편안한 모임을 갖는다던지, 가족과 외식을 하면 어떤가. 언뜻 보기에 소모적으로 보이겠지만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다시 루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루틴의 장점은 충분히 누리되 내가 만든 루틴으로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자.
생활계획표 대로 안 했다고 야단치실 부모님이 아직 계시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