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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니 Jun 30. 2023

[현실판] 결혼으로 인생역전

달동네에서 강남까지


Episode 1.



결혼 시장에 뛰어들려던 당시 나의 상황


내가 결혼 시장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 줄게. 우리 집은 일명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집이었어.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님 밑에서 여유 있게 태어나 명문대를 나온 남녀가 맞선으로 세 번 만나 보고 결혼을 했지. 아빠가 공무원이어서 큰 어려움없이 난초처럼 안락한 삶을 살았었어.  그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사업에 공무원이라 세상물정 모르던 아빠가 이름을 빌려주더니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대책 없이 풍비박산 났어.


 껍데기만 남아 있던 자산들은 내지도 못할 세금을 복리로 붙이고 있었고 집안의 가장이었던 아빠는 불명예스럽게 퇴직하고는 본인이 아인슈타인이라도 된 것 마냥 결과 없는 사업에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재정을  다 쏟아부었어. 살고 있던 집도 저당 잡아 빚만 내고 있었단다. 거기다 더 답답했던 건 그렇게 물어뜯고 싸움만 하던 경제력 없는 엄마가 지속적으로 쌓인 스트레스 탓에 우울증에 걸리더니 조기치매까지 앓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어.


‘엎친데 덮친 격이다. 갈수록 태산이다.’라는 말들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사회 초년생이 되어 취업해야 할 우리들은 엄마를 케어하느라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구하고 있었어. 장녀였던 내가 어영부영 30대가 되어버린 상태였지. 내 능력이 더 뛰어났다면 아이유처럼 선미처럼 집안을 일으켰을 수도 있지.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런 능력까지는 없었고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남았나 신기하기까지 해.  


다행인 건 그나마 부모님이 교육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 이어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교육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 오픈마인드여서 뭐든 다 해보라고 기회를 줬었거든. 학창 시절 미국으로 교환학생도 갔다 왔고 그 경험이 기반이 되어 대학교도 외국에서 졸업해서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은 갖추었거든. 그 덕에 계약직을 전전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름 있는 회사들을 전전하고 있었고  우연히 외국계 기업의 육아휴직 자리에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되었어. 그리고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고 경력까지 인정받으며 정규직으로 전환됐어.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흔히들 얘기하는 겨우 평범한 수준이 된 거지. 제대로 된 월급을 받으며 하루살이 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한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요양병원에 계시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사실 그때는 슬프다기보다 오히려 고마웠어. 정말 힘들고 미래가 전혀 안보였거든. 50대부터 생활비도 제대로 못 보태던 아빠에 엄마 병원비까지 나가면서 공과금도 못 내던 시절이었어. 가스와 전기가 끊기기 일쑤여서 집에는 부탄가스버너와 플래시가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빈곤이 일상이었거든. 빚더미 자산들은 차례로 경매에 넘어가기 시작했지. 게다가 자산을 몰수 당한 당사자인 아빠를 포함해서 가족 중 누구 하나 제대로 경매 등 법률적인 것들을 챙기지 않아 날짜 지난 낙찰통지서를 보고 난 후에야 경매에 붙여진 것을 인지하던 상황이었는데.


너, 그거 아니?! 채무금액이 경매 낙찰가보다 크면 빚이 청산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금이 체납되면 이자가 복리로 붙어. 게다가 세금은 파산이 안되거든. 신용불량자로 가는 지름길이지. 이걸 소유자인 부모님이 아닌 자식인 내가 날짜 지난 낙찰통지서를 방구석에서 발견하고 확인 전화를 해서 겨우 알아내고 있었어.


아빠를 보채 세무서에 쫓아가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식에게 떠넘긴 무책임한 인간은 허공만 쳐다보면 남의 일인 양 행동했지. 정말 피크였던 건 국가에서 하는 공모전에 아이디어를 출품하려다 부모님이 의료보험료를 장기간 미납한 걸 알게 된 사건이야. 정부에서 하는 공모전이라 세금 체납 내역 등 결격 사유가 없어야 접수가 가능했거든. 비상금으로 겨우 모아둔 적금을 털어 밀린 체납액을 내면서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사태를 이지경까지 만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어. 주변의 또래들은 작게나마 돈을 모으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나는 돈만 모으면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환경 때문에 다 나가버리는 상황이었거든.


 미래를 준비할 수가 없었어.




지금은 지난 일이니 잊어버렸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부모님이 끌어내리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어. 그리고 그때의 일은 흉터가 되어 기억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우리 상황을 알고 도와주시던 엄마의 대학교 동창생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거든. 모은 돈을 나와 동생에게 건네주시며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우리가 화장하고 액세서리를 착용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보더니 '돈을 아껴 쓰라'고 조언을 하시더라고.


도움을 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도움을 받는 이가 가져야 하는 감사하는 자세와 그 표현으로 행색도 초라하고 수수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고정관념을 요구하는 것 같았어. 그걸 피부로 느끼니 바닥까지 떨어진 나의 상황을 실감했고 나의 부모처럼 살며 자식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어. 당시 사회생활을 해가며 돈을 벌어야 되는 나와 내 동생은 지저분하고 다가가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나가서 일을 하는 것보다 깨끗한 모습으로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꾸밈을 하고 있었거든. 내가 자초하지 않은 지옥 생활에 기본적인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사는데 그 상황을 자초한 장본인인 ‘노동 가능 인구 연령대’의 부모님까지 부양하며 그 친구들이 그런 조언을 하는 것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내 인생을 스스로 주도하지 못하는게 너무 싫었어.




퇴직 후 20년 간 계속 제대로 된 경제생활을 못하는 상태인 부모님과 함께 사니까 예의범절이고 도덕이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나 신뢰는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았어. 또 고학력자인 부모님이 철저히 망가져 가는 모습에 교육에 대한 신뢰도 역시 바닥난 상태였어. 그렇게 쳇바퀴처럼 도는 지옥 같은 상황에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셨고 예상치 못하게 목돈이 쑥쑥 빠져나가는 일이 줄어들며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


과거 투잡 쓰리잡 할 때보다 액수는 적었지만 월급이라는 정기적인 수입에 예상치 못한 지출까지 줄어드니 돈이 모이기 것이 내 인생이 바뀔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 그리고 언제 얼마가 모일지 예상되니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면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지. 또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남들처럼 결혼이나 나의 미래에 대해서 까지 생각하게 되더라고. 기억에 남는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것에 갇혀 있지는 않았어. 앞으로 나아가야 부모님처럼 살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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