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
가만히 웅크려서 잠만 자고 있어도 사람들이 예뻐해 주니까.
고양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둘째가 말했다. "녀석도 나름의 고충이 많을 걸",라고 말해 주려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요즘 아이들 삶이 워낙 팍팍하다 보니 차라리 고양이가 낫겠다는 하소연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가정집에 들어와 살게 될 운명이 아니었다면 고양이의 삶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잠시 길고양이로 살고 있을 또 다른 세계의 딱지를 상상해보았다.
태어나 처음부터 치열한 길고양이의 삶을 살아왔더라면 녀석의 성격이며 능력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것들이 있다. 녀석이 길고양이로 살았다면 지금 나이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이다.
녀석은 그야말로 가정집에 알맞게 특화되어 있다. 그런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번식되어 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 주인 말로는 네 마리의 형제자매 중에서도 특히 온순하고 겁이 많았다고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고, 높은 곳을 싫어하며, 행동이 느린 편이다. 덕분에 집에서 키우는 화초 잎을 물어뜯는 일은 없고, 탁자나 선반 위 물건에 손을 대거나 깨뜨리는 일도 없다. 내 쪽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딱지를 집밖으로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개처럼 정기적인 산책을 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꽃이 피거나 눈이 올 때 집 바로 아래 공용 정원의 이끼 냄새라도 직접 맡게 해주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다소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품 안에서 몸부림을 치더니 흙이 있는 땅에는 닿자마자 아예 바닥을 깔고 엎드린 채 얼어버린다. 탐색도 탐험도 없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산책은 시도하지 않는다.
딱지는 익숙한 집안에서의 사냥실력도 그다지 좋지 않다. 사냥놀이를 할 때도 태반은 헛발질이다. 조금 큰 장난감을 들이대기라도 하면 무서운지 벌써 줄행랑이다. 어쩌다 집안에 날아든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걸 못 봤다. 윙윙거리는 벌레를 보면 가슴속에서 뭔가 치솟기는 한가 본데, 그에 비해 점프력이나 명중률은 한참 아쉽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딱지에게는 안전한 집이 있으니까. 높은 곳에 못 올라가도 사냥을 못해도 겁이 많아도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녀석도 매일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해내는 일이 있다. 고양이의 일, 그건 바로 그루밍이다. 농담 삼아 사람들은 고양이는 곧 털공장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고양이, 그것도 장모종인 페르시안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녀석들의 털에 관해서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딱지가 처음 우리에게 왔을 당시 녀석은 헐벗은 상태였다. 가능한 입양이 잘 되어 예쁨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전 주인이 미용을 해 준 것이다. 녀석들의 긴 털이 골칫거리라는 걸 예전 주인도 인정한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털이 다시 풍성해지기까지의 몇 달간 적응문제를 제외하자면 털로 인한 문제는 전혀 없었다. 공중에 털이 떠다니거나 집안 곳곳 솜사탕 솜 마냥 기다란 털이 무더기로 붙어 있는 일도 없었다. 배변 후에도 털에 묻는 일이 없으니 편했다. 겁 많은 녀석으로서는 털을 민다는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지만, 초보 집사로 모든 것이 서툴던 그때 털관리까지 맡아야 했다면 우리는 분명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9시, 나는 빗 두개를 사용해 꼼꼼히 녀석의 털을 빗어준다. 보통 고양이는 봄가을 털갈이 시기가 있다고 하지만, 온도가 일정한 집에서 사는 경우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한다. 딱지의 경우 시기가 매년 정해져 있는 건 아닌 듯 하지만, 아무튼 털이 평소와 달리 다량으로 빠지는 시기가 분명 있다. 이런 때라면 평소보다 오래 빗질을 하는데 빈말이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가 더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털이 빠져나온다. 빗질에는 타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아무리 빗어도 털을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그날 고양이의 기분과 내 어깨 상태를 고려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성껏 빗질을 해줘도 녀석이 할 일은 언제나 남아 있다. 보통 녀석은 내가 빗질한 부위를 다시 혀로 다듬는다. 털이 누운 방향이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녀석은 앞다리부터 시작해 가슴, 배, 사타구니, 꼬리까지 묘한 자세를 취해가며 온몸의 털을 점검한다. 직접 핥기 어려운 얼굴은 앞발에 침을 묻혀 얼굴을 닦는 방식으로 정리한다. 대충대충 한다는 뜻으로 고양이 세수라는 말을 하는 모양인데 실제로 고양이가 제 얼굴을 닦는 모습을 본다면 그리 말해서는 안 된다. 녀석은 매번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루밍에는 나름의 어려움이 따른다. 페르시안 고양이들은 유독 가슴털이 길고 풍성한데 엎드려 다른 부위 털을 다듬을라치면 가슴털이 입에 들어가 훼방을 놓는 것이다. 손가락이 없으니 입에 자꾸 감기는 가슴털을 빼내기란 쉽지 않다. 비슷하게 난도가 높은 부위는 바로 항문이다. 어지간히 유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긴 털에 변이 묻어 오염되기 쉬우므로 각별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 전체 그루밍은 하루 한 번 정도지만 항문 쪽은 배변을 할 때마다 해 줘야 한다. 꽤나 성가신 부분이다.
그루밍의 끝은 헤어볼이다. 열심히 빗질을 해도 어느 정도의 헤어볼은 불가피해 보인다. 처음 녀석이 토해낸 헤어볼을 꽤나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이 멀미를 할 때처럼 여러 번의 헛구역질 끝에 성인 엄지손가락 만한 단단한 털뭉치가 튀어나온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눈물 콧물에다 녀석의 턱은 침으로 흥건해진다.
오늘도 녀석은 그루밍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성껏 공을 들여도 내일이면 도로 제자리인 별 보람도 없는 일. 하지만 녀석은 크게 개의치 않고 열심히 털을 다듬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것은 고양이의 일, 자신을 가꾸는 아주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