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2층이다. 2층이기는 하지만 아래층이 없는 필로티 구조로 일반적인 2층보다 층고가 다소 높다. 예전에 살던 집은 훨씬 높은 층이었다. 전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땅과 너무 멀어져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공용 정원의 커다란 나무들도 손톱만큼 보일 뿐 진짜 나무처럼 보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여기는 좀 다르다. 눈 높이에 나무가 걸쳐 있고, 바로 옆에서 새가 울어대고, 창을 열고 손을 뻗으면 초록색 잎이 손에 닿는다. 길에서 넘어오는 소음이나 겨울철의 추위 같은 단점에도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정원을 내 집 정원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때 사생활 보호를 걱정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동의 다른 층에 비해 우리 집은 나무들이 길로부터의 시선을 막아준다. 잎이 없는 겨울에도 자잘하게 뻗은 가지들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역시 압권은 봄과 여름이다. 귀를 기울이면 사각사각 잎사귀 자라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어느새 말랐던 가지에 잎이 풍성해지고, 건너편의 다른 아파트는 자잘한 나뭇잎 틈새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진다. 우리집은 도시에서 물러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가을이 가기 무섭게 다음 해 봄을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 집 고양이는 나와 달리 늦가을부터 겨울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때야말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기 때문이다. 딱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거나 밖을 내다보는데 쓴다. 아니, 그저 밖을 내다본다는 말은 부족하고, 감시한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가을이 되어 잎이 떨어지고 나면 나무의 뼈대까지 훤히 보이기 시작한다. 잎에 가려 있던 땅, 바위, 길가는 사람들 모두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지 때문에 저편에서는 이쪽이 잘 안보이겠지만, 이쪽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는 오직 눈높이의 나무들만 볼 수 있었지만, 가을부터 다음 봄이 오기전까지는 시야가 확 넓어지는 것이다. 정찰병인 딱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아파트 정원에는 생각보다 많은 동물들이 출몰한다. 정원이라고는 해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닌 외곽지대라 동물들로서는 왠지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간 내가 본 것들을 말하자면, 길고양이들, 비둘기, 참새, 까마귀, 까치, 꿩, 너구리나 오소리가 아닐까 싶은 정체 불명의 동물 몇 마리, 게다가 가끔이지만 이곳으로 개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도 목록에는 개도 포함시켜야겠다.
시선이 미치는 곳에 고양이나 개가 나타나면 딱지는 바짝 몸을 엎드린 채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땅을 노려본다. 좋아하는 간식도 잠시 미룬다. 비상 상황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상의 침입자들보다 딱지를 더욱 긴장시키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새들이다.
겨울은 돌아다니는 새의 개체수는 줄어들지 몰라도 잎이 없으니 새를 관찰하기에는 더 없이 좋다. 녀석들이 벌레를 잡는 모습이나 똥을 싸는 모습,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잠을 자는 모습까지 문자 그대로 모든 행동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덜해졌지만, 처음 이 광경은 본 딱지는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순식간에 창가에 설치한 캣타워 높은 칸으로 튀어 올라간다. 몸은 최대한 낮추고 미동도 없지만, 꼬리만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지 좌우로 요동을 친다. 녀석의 눈동자는 최첨단 렌즈처럼 푸드덕거리는 여러 마리 새들의 움직임에 실시간 반응한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의 외벽에는 20센티미터 정도 너비의 평평한 선반처럼 된 곳이 있다. 일단 창턱이라고 부르겠다. 가끔이지만 새들이 창턱에 찾아올 때가 있다. 오는 녀석은 언제나 한 종류다. 참새라고 하기에는 크고 비둘기라고 하기에는 작다. 늘 궁금하던 차에 지인 중 새를 전공한 분이 계셔서 도움을 받았다. 사진을 찍어 여쭤보니 녀석들의 이름은 직박구리. 어딘지 귀에 익다 싶더니 예전 컴퓨터에서 새 폴더를 만들 때 황새, 논병아리 등과 함께 등장하던 바로 그 이름이다.
연한 하늘색 날씬한 몸에 머리털은 흡사 모히칸처럼 뾰족뾰족하다. 이름을 몰라 그간 검색을 못 했지만, 이름을 알고 나니 정보 찾기는 금방이다. 직박구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텃새 중 하나. 서울을 포함한 중부 일대와 남부 전역에 퍼져 있는 이 새는 과일을 쪼아 먹는 바람에 유해 조류 명단에 올라 있다. 울음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고 성격이 사나워 어지간한 새들도 녀석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도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아, 드디어 납득이 간다. 그렇게 겁이 없으니 유리창 너머 고양이가 숨을 참고 노려보고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날아왔구나.
아무튼 하루 종일 한 번이나 두 번 울까 말까 한 과묵한 딱지도 직박구리가 창턱에 앉으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일반적인 냐옹과는 다른 짹짹거리는 소리다. 채터링이라고 한다. 채터링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가설들이 있다고 한다. 사냥감을 보고 너무 흥분해서 내는 소리라는 설, 새들과 비슷한 소리를 내서 먹잇감을 유인하려는 행동이란 설, 사냥 전에 몸을 준비시키는 준비운동이라는 설, 혹은 사냥을 할 수 없음에 실망한 체념의 소리라는 설.
아, 나는 매인 몸이야. 너희를 잡고 싶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구나.
어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 주렴. 너를 보고 있자니 나는 너무 괴로워!
딱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마지막 설이다. 일단 사냥을 하려면 자기 소리를 감춰야 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장난감으로 사냥놀이를 할 때 딱지는 채터링을 하지 않는다. 녀석이 똑똑해서 이것이 진짜 사냥을 흉내낸 가짜란 걸 알기 때문일까? 언젠가 집안에 벌레가 들어왔을 때도 녀석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순식간에 벌레에게 몸을 날렸었다. 이 때도 역시 녀석은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게다가 채터링을 할 때는 유리창에 몸을 날리는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잠시 내다보다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다. 아니, 저기 저렇게 예쁜 새가 지척에 있는데 녀석은 왜 못 번 척 딴청이란 말인가? 녀석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녀석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녀석의 실망과 좌절의 한숨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