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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기 Apr 02. 2024

그냥 싫어하는 걸 하지 말아요


언젠가부터 녀석은 눈에 띄게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불러도 잘 오지 않지만 역시나 내가 부르면 꽤나 높은 확률로 반응한다. 발톱을 깎거나 목욕을 하는 등의 싫은 일도 훨씬 잘 참아준다.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곁에 와서 얼굴을 비비고 내 손을 핥기도 한다. 결코 아무에게나 하는 행동이 아니다. 


세상 일이 이렇게 오묘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나 남편과 달리 나는 정말 오랫동안 녀석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녀석을 경계하고 어려워했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석 달 넘게 걸렸고, 털을 빗거나 약을 발라 줄 때면 긴팔 옷에 두꺼운 털장갑까지 끼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사냥놀이를 해 줄 때도 나는 가장 긴 낚싯줄을 써야 했고, 혹여 녀석이 놀이 중 흥분해 내 발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겨울 양말에 앞코가 막힌 슬리퍼를 신고서야 놀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끔찍해서 간식도 늘 녀석 쪽으로 멀리 던지고는 도망치듯 몸을 피하곤 했다. 아이들이 하듯 손바닥에 간식을 놓고 먹인다는 것은 집사가 된 지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가능해진 일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녀석의 최애가 되어 있다. 녀석은 우리가 활동하기 시작할 즈음 늘 캣 타워 한 칸에 앉아 밖을 보고 있거나 안방 옆 스크레쳐에 몸을 뉘이고 있다. 다른 가족들이 아무리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밥을 줘도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딱지의 본격적인 아침은 내가 거실로 나가야 시작된다. 나를 보면 고양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온다. 중간에 꼭 한 번 멈춰 몸을 길게 늘인 후 다시 녀석은 내게 다가온다. 이미 꼬리를 한껏 하늘로 올라가 있다. 그리고는 내 다리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다. 정중한 아침 인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는 잘 잤습니다만."


나는 녀석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엉덩이를 툭툭 쳐준다. 그리고 화장솜을 작게 접어 녀석의 눈곱을 정리해 준 후 사료와 물을 챙긴다. 


"딱지야 밥 먹어."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는 눈치다. 아침에 바쁜 나를 배려하는 건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창가로 가 앉는다. 밖으로 나갈 사람이 다 사라지고 나면, 녀석은 슬며시 내 곁으로 온다. 나는 간식을 조금 주고는 빗질을 시작한다. 빗질이 끝나면 양치질이다. 가능한 하루에 한 번은 양치질을 빼먹지 않으려 한다. 빗질이니 양치질, 분명 고양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녀석은 이 시간이면 이걸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눈치다. 나는 상당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고 규칙적인 것을 좋아하는 걸로는 고양이도 만만치 않다. 녀석은 이게 끝나야 잠깐의 사냥놀이가 이어질 것을 알고 있다. 놀이가 끝나면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녀석은 내 곁을 맴돌기는 하지만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돌아보면 녀석은 오후까지 이어지는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녀석과의 하루는 보통 이런 패턴을 따른다. 우리는 정해진 방식대로 움직이고 어지간해서는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나는 녀석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향이 강한 화장품이나 비누를 쓰지 않으며,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일부러 조심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물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맛있는 간식을 실컷 먹여주고, 내내 안고 쓰다듬으며 꿀이 뚝뚝 떨어지게 사랑을 표현해 주는데 왜 자신들이 아닌 저 무심한 엄마가 녀석의 최애란 말인가? 세상 일이란 게 주는 만큼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은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들의 애정은 양만 넘쳤지 고양이에게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쉽지만 그렇게 한번 마음을 정한 이상 녀석은 꽤나 냉정하다. 


솔직히 나로서는 조금 어리둥절한 게 사실이었다. 아이들에 비해 내가 녀석에게 주는 애정이란 얼마나 얕고 묽은 것인가? 녀석이 배를 보이며 몸을 배배 꼬아도 나는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녀석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얼굴을 비비고 간식을 들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저 머리를 톡톡 한 두 번 쳐 준 후에는 내 일을 할 뿐이다. 녀석이 스핑크스 자세로 볕을 받으며 식빵을 굽고 있어도 그저 등을 한 번 쓸어줄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녀석이 원하는 애정은 딱 그런 것이었나 보다. 


목에 리본을 달지도 않고,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씌우지도 않는다. 귀엽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도 않는다. 갑자기 안아 올리는 일도 없고, 얼굴을 들이대어 비벼대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녀석이 좋아하는 행동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녀석이 싫어하는 행동을 덜 해서 녀석의 최애가 된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관계의 핵심은 바로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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