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자썰61] 鄉, 작고 어진 이들의 땅

배추전 익는 내 고향

by 우공지마

鄉(시골 향) : 幺(작을 요) + 皂(하인 조) + 邑(마을 읍)


鄉(시골 향)은 갑골문을 보면 음식이 가득 담긴 그릇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정겹게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손님을 초대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鄉의 원래 뜻이 ‘대접하다’, ‘잔치를 베풀다’였다.


그런 정겨운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고향이고 시골이라 鄉은 고향 또는 시골이 된다. 鄉에는 잔치나 대접하다의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잘 쓰이지는 않고, 대신에 食 자를 보탠 饗(잔치 향) 자가 새로 만들어진다. 향연(饗宴)에 들어 있는 글자다. ([표1] 1, 2)


[표1] 향(鄉)의 자형변천

흥미롭다. 음식을 정겹게 나눠 먹고 이웃과 잔치 베풀기를 즐기는 곳이 고향 또는 시골이었다니 말이다. 향(鄉) 자는 옛 촌락사회의 전통적 가치를 잘 대변해 주는 글자다.


도시는 어땠을까? 都(도읍 도)는 渚(물가 주)에 위치한 邑(=⻏,마을 읍)이다. 강변 마을에는 물산이 모인다. 상류에서 실어 내리고 바다를 건너 강을 거슬러 올라온 갖가지들이 넘친다. 육로는 고개를 넘고 계곡을 건너 사람과 우마가 오래도록 다녀야만 겨우 낼 수가 있지만, 수로는 강과 호수 위로 이미 나 있으니 사람들은 그 적당한 물가에 모여 살기만 하면 그만이다. 물의 흐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동력이 되니, 인신이나 물자의 대량 수송에는 육로보다 수로가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고대에 번성한 큰 도시들은 대부분 큰 강의 중하류에 위치한다. 都(도읍 도)는 그런 유래가 담긴 글자다.

[표2] 시(市)의 자형변천

市(저자 시)는 갑골문을 보면 발이 닿는 곳이다. 저자거리에는 사람들 발길(止)이 모이고 섞이니 시끄럽고 혼잡하다. 아랫부분은 兮(어조사 혜)인데 그렇게 소리가 번잡하게 퍼져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兮로는 모자라, 윗부분에 발 주변으로 점까지 두세 개씩을 찍어 놓았다.([표2] 1~3) '야료(惹鬧) 부린다'는 말이 있다. 까닭 없이 트집을 잡고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뒷글자 鬧(시끄러울 료/뇨))는 鬥(싸울 투)와 市(저자 시)의 합자다. 온갖 사람들이 흥정과 모략, 비방과 분쟁으로 요란법석을 떠는 곳이 시장이라는 것이다. 주 1)


사족, 향(鄉)을 지금 모양 그대로 분해하면 幺(작을 요), 皂(하인 조) 그리고 邑(마을 읍)의 합자다. 보잘것없는 미천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된다. 가운데를 良(어질 량)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리하면 보잘것은 없지만 착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주 2)


소시 때 내 고향 경상북도 순흥 산골 마을에도 잔치가 제법 있었다. 잔치라고 하기에 소박하고 조촐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중에 생각나는 한 가지가 배추전이다.


가마솥 뚜껑을 거꾸로 엎어 놓고, 숭덩 자른 무 윗둥에 기름 듬뿍 묻혀서 뚜껑 바닥에 둘러놓고, 뚝뚝 뜯어낸 싱싱한 배추 잎에 묽은 밀가루 반죽 입힌 둥 만 둥해서 칙칙 부치다가, 노릇해질라치면 반죽 물을 슬슬 조금 더 뿌리고, 주걱이나 국자로 꾹꾹 눌러서, 오봉에 대충 올려 한상 차려 내면 그게 우리 고향 배추전이다. 너무 익으면 배추 단맛이 마르고 식감이 떨어져 맛이 한참 덜하다. 흰 배추 줄기는 여전히 씩씩하고 푸른 이파리만 약간 오그라 들 정도면 그 때가 딱 제격이다. 어린 시절이라 곁들이면 좋았을 막걸리는 입에 대지도 못 했지만 그 시원하고 따스한 맛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미천하다', '비루하다', '보잘것없다', 다 쓰잘 데 없는 소리다. 없는 살림에도 그 맛난 배추전 넉넉히 나눠 먹던 곳이 고향이고 시골이다. 사람 냄새가 가시면 도(都)나 시(市)가 아무리 편하고 좋다해도 다 헛방이다. 哈哈。


주) 1. 兮(어조사 혜)는 갑골문을 보면 도끼 찍는 소리가 퍼지는 것을 나타냈다. 퍼지는 소리로 가차 되다가 지금도 그 흔적으로 감탄사에 주로 쓰인다.

2. 향(鄉)의 갑골문이 전하는 낭만주의에 불만을 품은, 도시 것들이 고향과 시골을 음해하거나 부러워하여 억지로 짜낸 글자일지도 모르겠다. ㅎㅎ

keyword